꽃이 남긴 말~24화
화려한 봄날의 열병, 그 후의 평온~ 철쭉
매년 봄이면 산마다 철쭉이 핀다.
푸른 능선 위로 붉은빛이 번지기 시작하면, 산은 잠시 다른 얼굴이 된다.
개나리가 먼저 봄을 열어젖히고 지나가면, 철쭉은 그 뒤를 이어 봄의 한가운데를 채운다.
나는 봄을 좋아한다. 가지에 물 오른 연둣빛 꽃망울은 너무 귀하고 아름답다.
소백산 철쭉제, 비슬산 철쭉제를 자주 찾아다녔다. 예전에는 주말이면 남편과 함께 등산 모임 사람들을 따라 산을 올랐다.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능선길은 정말 눈이 부셨다. 꽃들은 마치 서로 먼저 보이겠다는 듯 가지 끝마다 붉게 올라와 있었다. 사진을 찍느라 멈춰 서 있다 보면 어느새 일행이 저만치 앞서가 있었다. 뒤늦게 따라가며 숨을 고르던 그 순간들이 지금은 웃음 섞인 추억이 되었다.
그때는 그런 줄 알았다. 이렇게 화려한 봄이 오래갈 것 같았고, 이 붉은 풍경이 삶의 절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산을 내려오는 길에는 늘 조금 다른 마음이 남았다.
꽃은 눈부셨지만, 그 꽃을 매달고 있는 가지는 어딘가 팽팽해 보였다. 그 가지가 문득 힘겨워 보였다.
돌아보면 내 삶도 그랬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인정받고 싶어서,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숨 가쁘게 달리던 시간들이 있었다.
내가 가진 초록의 모습보다 남들이 알아봐 주는 붉은 꽃 같은 순간에 더 마음을 쏟았다.
그러고 나면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했다.
그러다 어느 해, 꽃철이 지난 산을 다시 찾았다. 며칠 사이 비가 내렸고 능선을 가득 채우던 철쭉은 거의 다 져 버리고, 바닥에는 젖은 꽃잎들이 조용히 흩어져 있었다.
처음엔 철쭉의 시간이 정말 끝난 것 같았다. 사람들도 없고, 벌과 나비도 보이지 않았다.
산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런데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다른 풍경을 보았다.
붉은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초록이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꽃이 진 자리의 잎들은
오히려 더 편안해 보였다. 누구에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누구와 경쟁하지도 않고,
그저 햇살을 받고 바람을 견디며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순간, 철쭉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괜찮아.
붉게 피던 시간도 너였고,
이렇게 조용히 남아 있는 시간도 너야.”
꽃은 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몸을 가볍게 만드는 거라고, 다시 숨을 쉬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삶도 비슷한 것 같다. 화려했던 시절이 지나고 나면 허무만 남는 줄 알았는데 그 뒤에는 오히려 조용한 안정이 찾아오기도 한다. 붉었던 나와 초록인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뿌리에서 나온 다른 계절일 뿐이다.
산등성이의 열기가 지나간 뒤, 나는 이제야 조금 숨을 쉰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잎사귀 하나에 머무는 평온이 붉게 타오르던 꽃잎보다 더 깊게 남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철쭉이 남긴 말은 화려한 소멸이 아니었다. 그 뒤에 오는 초록의 시간,
“이제는 조금 덜 애써도 된다”는 조용한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