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남긴 말~22화

다시 시작하는 이에게 건네는 응원~프리지어

by 박영선

노란 프리지아 한 다발이 책상 위에 놓이는 순간, 방 안은 계절보다 먼저 봄의 기운으로 차오른다. 장미처럼 불타는 정열도, 백합처럼 고고한 위엄도 없지만, 조로롱 매달린 작은 봉오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쪽을 환하게 밝힌다. 나는 이 꽃이 늘 “괜찮아”라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좋다. 아마 많은 이들이 프리지아를 보며 ‘시작’을 떠올리는 건, “당신의 시작을 응원해”라는 꽃말이 생각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작을 흔히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첫 선을 긋는 일이라 말한다. 하지만 삶을 꽤 통과해온 나에게 시작은 늘 정리되지 않은 서랍처럼 느껴진다. 미처 접지 못한 기억들, 잘해냈다고 말하기엔 어딘가 찜찜한 선택들, 그리고 그럼에도 버리지 못한 마음들까지.


프리지아가 제 몸집보다 훨씬 진한 향기를 내는 건, 차가운 겨울 흙 속에서 그 모든 시간을 한데 모아 견뎌냈기 때문일 것이다.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기가 서랍 속에 엉겨 있던 해묵은 불안들을 가만히 밀어낸다.


돌아보면 나는 너무 자주 마침표 앞에서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이쯤이면 달라졌어야 하지 않느냐고, 이 정도면 이제는 완성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삶의 마침표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 점 하나는 끝이 아니라, 다음 문장으로 건너가기 위한 숨 고르기였다. 서툴렀던 선택과 어정쩡한 성취들,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들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프리지아 앞에서는 괜히 마음이 느슨해진다. 이제 막 세상이라는 문턱 앞에 선 이들에게도,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매는 어른들에게도 이 꽃은 굳이 큰 말을 하지 않는다. 꽃대 아래에서부터 위로 차례차례 피어나는 봉오리들은 말한다. 조금 늦게 피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초조해하지 말라고. 먼저 핀 꽃이 길을 보여주면, 뒤에 피는 꽃은 그 길 위에 자기만의 향기를 더하면 그뿐이라고.


삶의 지혜란 내가 가진 것들을 골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전부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는 걸 요즘에서야 알겠다. 빛나던 순간뿐 아니라 어두웠던 그림자까지도 내 삶의 일부로 껴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프리지아의 노란 빛깔은 단순히 밝기만 한 색이 아니다. 그건 모든 계절을 통과해온 이가 내는, 가장 단단하고 투명한 빛이다.


꽃대에 매달린 마지막 봉오리까지 고개를 들 때 비로소 하나의 꽃이 완성되듯, 우리의 삶도 끝없는 시작의 반복 속에서 완성되어 간다. 회고가 남기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조용한 확신이다.


오늘 나는 프리지아 꽃잎 사이로 스며드는 봄바람을 상상한다. 다시 시작한다는 건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시간을 품은 채 조금 더 멀리 걸어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안에 지나간 계절들이 있다. 서툴렀던 봄도, 오래 머물던 겨울도. 그 모든 시간이 겹쳐져 지금의 향기가 되었다.


프리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노란 빛으로 충분히 전하고 있다. 시작은 늘 조용히 찾아오고,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서 있다는 것을.

22화 프리지아.png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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