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스민 꽃~14화

소박한 웃음~ 들꽃

by 박영선


들꽃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 달라고도, 눈길을 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길 가장자리나 들판, 산자락이나 오래된 담장 아래에서 그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시선이 닿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가 조용히 드러난다. 나는 그런 순간에 들꽃을 만난다. 의도하지 않았기에 더 오래 마음에 남는 만남이다.


들꽃은 대개 특별한 손길을 받지 않는다. 비옥한 흙도, 일정한 물 주기도, 보호막도 없이 계절을 통과한다. 햇빛이 모자라면 키를 낮추고, 바람이 세면 몸을 눕힌 채 방향을 바꾼다. 비옥하지 않은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누가 돌보지 않아도 계절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제 몸으로 계절을 통과한다. 화단의 꽃처럼 정돈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자연스럽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태도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들꽃을 바라보다 보면 내 삶과 겹쳐 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크게 빛나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하루들을 소홀히 넘기지 않으려 애썼던 시간들. 눈에 띄는 성취보다 오늘을 버텨내는 일이 더 중요했던 날들.

그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들꽃 앞에서 문득 느끼게 된다. 화려하지 않아도, 내 몫의 시간을 지나온 삶이 그 앞에 조용히 서 있다.


어릴 적 나는 들꽃을 꺾어 책 사이에 끼워두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 색은 바래고, 종이처럼 얇아져 손끝에 닿기만 해도 부서질 만큼 연약해졌지만 그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말린 꽃을 비닐로 코팅해 편지지 사이에 끼워 보내기도 했고, 작은 선물을 건넬 때 몰래 넣어 두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을지 모를 들꽃이 그때의 나에게는 마음을 전하는 가장 조용한 언어였다.


아마도 들꽃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 시절부터 조금씩 쌓여 온 감각의 결과일 것이다.
눈에 띄는 것보다 오래 남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에 마음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간들 말이다. 삶이 점점 단순해질수록, 나는 더 소박한 것들에 시선을 머물게 된다.


시인 나태주는 말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그 한 줄은 들꽃 앞에서 유난히 또렷해진다. 들꽃은 멀리서 보면 그저 풀처럼 보인다.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늦추어야 비로소 보인다. 어쩌면 들꽃은 우리에게 삶을 대하는 시선을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높이 오를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멈춰 서서 바라볼 것인가를.


요즘의 나는 예전보다 덜 서두른다. 더 많이 가지려 하기보다,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삶은 언제나 앞서가라고 재촉하지만, 나는 이제 멈춰 서 있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들꽃에게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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