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 화단에는 봄이면 어김없이 빨간 튤립이 피곤했다. 해를 받으면 꽃잎이 투명하게 빛났고,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스케치북에 꽃을 그리라고 하면, 나는 늘 붉은 튤립부터 그렸던 기억이 난다. 짙은 빨강을 천천히 칠하다 보면 화단에서 보던 그 튤립이 스케치북 위에도 조용히 피어나는 듯했다.
요즘도 공원을 걷다 튤립을 보면 그때의 장면이 조용히 따라온다. 아무 걱정 없이 예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송이를 오래 바라보던 어린 날의 나. 그때는 몰랐다. 그 꽃이 한때는 누군가의 욕망을 뜨겁게 흔들어 놓던 존재였다는 것을.
16세기 네덜란드에서 튤립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전에 보지 못한 색과 무늬에 빠르게 매혹되었다고 한다. 햇빛에 따라 빛이 달라지고 줄무늬가 생긴 희귀 품종은 특별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졌다. 그 ‘남들과 다른 튤립’은 점점 부와 신분을 드러내는 표식이 되었다.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구근이 거래되기도 했고, 한 송이만 잘 갖고 있어도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튤립은 어느 순간 꽃 그 자체보다 그 꽃이 가져다줄 미래의 기대가 더 비싼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꽃은 결국 꽃일 뿐,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을 담아낼 그릇이 되기엔 너무 작고 연약했다. 거품처럼 부풀었던 기대는 결국 허망함으로 꺼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욕망의 모양은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질 뿐, 사람들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튤립이 아니어도 우리는 여전히 어떤 것에는 지나친 기대를 걸고, 어떤 것에는 이유 없는 집착을 덧 씌우며 산다. 그러다 마지막에 남는 감정은 대부분 비슷한 모양의 허망함일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요즘 화단에서 만나는 튤립은 참 고마워 보인다. 황금 값을 치러야만 볼 수 있던 꽃을 우리는 지금 아무 조건 없이 바라본다. 공원에서도, 작은 가게 앞 화분에서도, 그저 피어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다. 누군가의 욕망을 흔들던 꽃이 이제는 우리 일상의 색이 되었다는 사실이 어쩐지 다행으로 느껴진다.
욕망은 멀리서 시작되지만 감사는 늘 가까운 데서 피어난다. 어린 시절 스케치북에 그리던 그 빨간 꽃이 지금의 나에게 조용히 알려주는 사실이다. 오늘 눈앞에서 붉게 피어 있는 튤립이 문득 더 고맙게 느껴지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색이라는 것은 결국 빛이 남긴 자국이고, 우리는 그 자국을 통해 사물의 마음을 읽어내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내가 사랑했던 건 붉은 튤립이었지만, 요즈음은 노랑, 분홍, 보라, 흰색까지 빛의 결에 따라 전혀 다른 마음을 건네는 수많은 색의 튤립이 있다. 빨강은 뜨겁고 단단한 마음처럼 보이고, 노랑은 봄 햇살 같은 기쁨을, 보라는 조용한 위로를, 하양은 잠시 머무는 평온을 닮았다.
색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한다. 욕망의 그림자도, 일상의 감사도, 모두 빛이 남긴 서로 다른 언어들이다. 봄 햇살 아래 다양한 색의 튤립이 다시 피면 그 꽃들은 오늘의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