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담장 위로 흘러내리던 날이었다. 길가에 피어난 수선화 몇 송이가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꽃잎은 아직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자신의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마치 내 안의 무언가가 그 꽃을 오래 바라보라고,
말없이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수선화에는 오래된 신화가 있다. 연못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그 매혹에 스스로 빠져버린 나르키소스의 이야기. 그가 쓰러진 자리에 피어난 꽃이 바로 수선화라고 한다. 그래서 이 꽃에는 늘 두 가지 마음이 함께 깃들어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꺼이 마음을 내어놓는 사랑. 이 두 마음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선 나를 잃지 않아야 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선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줄 용기도 필요하다.
수선화는 그 미묘한 균형을 작은 꽃잎 안에 담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런 꽃과 닮아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더 조심해야 하고, 마음이 깊을수록 더 지켜야 할 것이 많아졌다. 기대고 싶지만 무너지고 싶지 않은 마음, 사랑하면서도 자유롭고 싶은 마음, 그 사이에서 우리는 늘 천천히 흔들린다. 어쩌면 수선화는
“너는 너의 빛을 잃지 말라”며 조용히 말해주는 지도 몰랐다.
상대에게 향하면서도 자기중심을 놓지 않는 법,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다른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듯이.
정지용 시인은 수선화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쁘게 달 아래 고요히 젖어 있는 네 그림자.”
나는 그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사람 마음의 결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조금은 아린 마음,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온기. 사랑과 외로움이 함께 빛나는 작은 그림자 같아서이다. 그래서인지 수선화는 늘 ‘새로운 시작’을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의 졸업식, 새로운 도전, 지금의 나에게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순간에 이 꽃은 조용히 용기를 건넨다.
“너를 잃지 말고, 그러나 마음의 문도 닫지 말라”라고.
오늘도 길가의 그 수선화를 지나며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을까.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나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그 물음 앞에 잠시 멈춰 서자 꽃잎 한 장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치 대답을 대신하는 것처럼.
수선화 앞에서 나는 작은 다짐을 해 본다. 흔들리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겠다고. 누군가를 사랑하되 내 안의 목소리도 놓치지 않겠다고. 그리고 내 삶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빛을 향해 나아가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