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삶 속에 스민 꽃~13

향기의 위로~ 라벤더

by 박영선


어느 해 허브 농장을 찾았던 날을 나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산을 넘어 펼쳐지던 그 넓은 들판 위로 보랏빛 물결이 출렁이며 번져 오고 있었고,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라벤더 잎사귀들이 작은 방울처럼 반짝이며 흔들렸다. 그 풍경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아름다웠지만, 진짜 놀라움은 가까이 다가갔을 때 찾아왔다. 손끝으로 한 줄기잎을 스치자 은은하게 퍼져 오던 향~! 그 부드럽고도 깊은 향기가 내 숨결 사이에 조용히 스며들어 마음속에 쌓여 있던 먼지까지 천천히 가라앉히는 듯했다.


그날 나는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향’이라는 것이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붙잡고 어루만지는 하나의 기억이자 위로라는 사실을.


라벤더라는 꽃을 들여다보면 참 묘하다. 작고 수수한 꽃들이 모여 하나의 촘촘한 이삭을 이루고, 그 안에 은은한 향을 꽉 채워 넣는다. 예로부터 지친 사람들의 머리맡을 지켜 주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상처를 달래 주던 꽃이라 전해진다. 중세 유럽에서는 병원 창가마다 라벤더가 심어져 아픈 사람들의 불안을 달래고 악취를 막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잔잔한 보랏빛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마음의 결을 가만히 다시 세우는 치유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오랫동안 라벤더는 고요함과 회복의 꽃말을 간직해 왔다. 꽃말 또한 ‘기다림’, ‘평온’, ‘당신을 기다립니다’처럼 조용한 인내와 깊은 마음의 온기를 담고 있다. 그 향의 부드러움이 단순한 향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 이유도

바로 그 오래된 치유의 역사 속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라벤더 향을 오래 맡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내 몸보다 먼저 마음이 숨을 고르기 시작한다. 마치 ‘조금 쉬어도 괜찮아’ 하고 말해주는 듯하다. 사람 사이에서도 이런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말이나 표정 한 줄에서 우리가 잠시 내려놓고 싶은 짐을 대신 들어주는 듯한 온도를 느낄 때가 있다.


아마 라벤더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 자극적이지 않지만, 금세 사라지지도 않으며,
천천히 스며들었다가 필요한 순간 가장 깊게 머무는 향. 삶도 그런 온도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누군가의 하루에 작게나마 향기로 스며들 수 있다면, 그리고 또 누군가의 향기로 다시 회복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이미 충분히 단단하고 따뜻해지는 것 같다.


공방에 머무르던 시절, 나는 라벤더 오일을 참 자주 사용했다. 밤마다 잠들지 못하던 이들에게 건네던 작은 라벤더 향초, 피부가 민감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던 수제 화장품, 그리고 은근한 향이 오래 남는 비누까지... 라벤더는 내 작업대 위에서 가장 오래, 가장 자주 머물렀던 향이었다. 향 하나만으로 사람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볼 때면 ‘아, 나는 지금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빛 하나를 켜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라벤더 에센셜 오일 1kg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 200~300kg의 생꽃이 필요하다고 한다. 엄청난 양이다. 작은 병 하나가 얼마나 많은 꽃들이 바람을 견뎌내야 하는지, 응축된 한 농장의 계절이었는지를 생각하면, 그 향을 쉽게 쓰지 못하고 그 향을 더 소중하게 다루게 되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마음이 지쳐 있다면, 보랏빛 작은 꽃 한 송이가 조용히 기댈 자리를 내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벤더 향이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나요?”라고 묻는 것 같다. 그 물음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오늘의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삶의 소란한 일상 속에서도 한 줄기 보랏빛 향처럼 누군가에게 조용히 스며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지친 날에는 라벤더처럼 누군가가 남긴 은은한 향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란다.



벤즈스쿨 (6).jpg
제목 없는 디자인 (5).png
왼쪽: 보랏빛이 주는 치유의 무드를 담은 리아트리스(기다란 꽃대). 오른쪽: 보라색의 라벤더지만 은빛 기운이 살짝 돎.





비누 보정.png 위 비누를 만들 때 라벤더 향을 넣어 만들었던 기억이 나서 올려 보았어요.~^^


보랏빛 라벤더 들판이 펼쳐지는 상상을 하시면서 눈을 감고

아래 음악을 들으며 잠시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


Ludovico Einaudi – <Nuvole Bianche>

https://youtu.be/4VR-6AS0-l4?si=JbMwd4v6-UYwBhvw


Yiruma – <River Flows in You>

�https://youtu.be/fiBvOKmuWKg?si=XNuPSvwIQhUIrtwE


Lavender Forest

https://youtu.be/OXGhV-zRFTM?si=qtKLdEDLSnfq0mWU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12화삶 속에 스민 꽃~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