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꽃이 가르쳐준 마음의 모양~9

겨울 끝의 희망~매화

by 박영선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면 마음이 먼저 겨울로 향한다. 찬바람이 불어오고 나뭇잎이 마지막 몸짓을 할 때면, 나는 이상하게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떠올린다. 눈 속에서 피어 날 매화. 그 고요한 향기는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의 끝자락에서 이미 내 마음 한쪽을 살짝 물들이고 있다.


강원도 동해에 머물던 어느 날, 서리와 눈보라 속에서도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매화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하얀 눈을 머금은 매화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그 속에 다 담겨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추위와 싸우며 이른 봄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자태만으로도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봄의 향기를 머금고 주변을 은은하게 채우는 흰 매화의 청순함은 부드럽고 여린 감성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옛 선비들이 매화를 시나 그림의 소재로 즐겨 다루며 사랑하지 않았을까 싶다.


기다림은 보이지 않는 준비의 시간이다. 모든 꽃이 지고 난 뒤 세상은 잠든 듯 고요해지지만, 그 속에서도 생은 쉼 없이 움직인다. 매화는 지금쯤 단단한 나무속 어둠에서 자신을 빚고 있을 것이다. 이토록 조용한 시간에, 사랑도 이렇게 긴 기다림을 통해서만 피어나는 것일까.


문득 오래된 전설이 떠오른다. 젊은 용래라는 남자는 세상을 떠난 약혼녀의 혼이 매화나무에 깃들었다고 믿었다. 그는 평생 그 나무 곁을 떠나지 않았고, 죽어서도 휘파람새가 되어 매화 곁을 맴돌았다고 한다. 눈 내린 새벽마다 들린다는 그 새의 울음은 단순한 새소리가 아니라, 그리움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참으로 애틋한 일이라는 걸 느낀다. 사랑이란 결국 기다림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매화는 휘파람새의 울음에 대답하지 않지만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향기로 다시 피어난다. 그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오래된 약속처럼 느껴진다.


가끔은 매화가 부럽다.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계절을 정직하게 살아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매화의 꽃말은 고결, 충실, 인내, 맑은 마음이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단어들보다, 그 모든 시간을 견뎌내는 매화의 조용한 진심이 더 고귀하게 느껴진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진심은 말로 완성되지 않는다. 멀리서 바라보며, 그리워하며, 기다려주는 마음속에서 깊어진다.


겨울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 계절의 공기 속에도 이미 매화의 향이 스며 있는 듯하다.
그 향기는 강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미세하게, 마음을 스치듯 다가와 오래 남는다.


삶의 관계들도 그런 것 아닐까. 눈부신 순간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남는 한 줄기 향기 같은 것. 나는 아직 보지 못한 매화를 떠올리며 조용히 걸음을 멈춘다.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고, 한 잎이 내 발끝에 내려앉는다. 그 순간 알 것 같다. 기다림은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피어날 봄을 믿는 따뜻한 약속이라는 것을.


하얀 잔설 속에 조용히 피어 있던 설중매. 그곳의 산하가 다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꽃9화~본문삽임.png
꽃9화 본문 삽입용.png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8화꽃이 가르쳐준 마음의 모양~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