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갈대를 만났다. 장미처럼 화려한 꽃잎도, 사람을 홀리는 향기도 없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수만 개의 이삭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은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는 굴복이라기보다, 지나가는 바람의 결을 온몸으로 환대하는 너그러운 몸짓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갈대를 흔들리는 마음의 대명사라 부르곤 한다. 가벼운 바람에도 중심을 잡지 못하는 나약함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 갈대는 쉽게 마음을 바꾸는 변덕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끝내 부러지지 않는 가장 지혜로운 강인함으로 읽힌다.
갈대의 줄기는 속이 비어 있다. 그 '비어 있음(空心)'이야말로 갈대가 지닌 생존의 철학이다. 줄기 안을 고집이나 욕심으로 가득 채워두지 않았기에 거센 태풍이 불어와도 그 바람을 제 몸 안으로 통과시키며 제자리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도 이와 닮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군가와 마주할 때 나만의 원칙과 편견을 빽빽하게 채워두면 타인의 진심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상대의 서툰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고 마음이 툭 꺾이는 건, 어쩌면 내 안의 여백이 부족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비어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은 내 안에 머물 수 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을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라 했다. 그러나 그는 뒤이어 '생각하는 갈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연약한 육신이지만,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인간은 그 어떤 거대한 자연보다 존엄하다는 뜻일 게다. 관계 속에서 마음이 일렁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흔들림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내가 타인이라는 존재에 반응하며 뜨겁게 사유하고 있다는 가장 선명한 살아있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갈대는 땅도 아니고 물도 아닌 그 경계에서 자란다.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모호한 경계에 뿌리를 내린 채, 흐르는 물과 단단한 땅을 매개하며 하나의 군락을 이룬다. 그들은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서글서글한 소리를 내지만 결코 서로를 얽매거나 구속하지 않는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함께 흔들리며 서로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뿐이다.
관계에서의 유연함이란 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의 방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뿌리는 땅속 깊이 박아둔 채 잠시 허리를 굽혀 폭풍을 흘려보내는 지혜다. 꺾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 그것은 비굴함이 아니라 본래의 나를 끝까지 지켜내기 위한 가장 고결한 선택이다.
갈대밭에 서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내 마음이 누군가로 인해 깊게 일렁이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타인이라는 바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신호다. 속이 비어 있기에 소리를 낼 수 있고, 흔들릴 수 있기에 꺾이지 않는 갈대의 뒷모습을 본다.
나는 갈대를 보며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와 같기를 바란다. 딱딱하게 굳어 부러지기보다는 유연하게 휘어지며 함께 흐를 수 있기를. 내 안을 조금 더 비워내어 누구든 편히 머물다 갈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가질 수 있기를.
화려한 꽃을 피우지는 못해도 바람이 부는 대로 춤추며 제 자리를 지키는 갈대의 뒷모습에서 나는 오늘도 타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