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이방인이나 이센스의 이방인과는 1도 관련이 없다. 이방인이란 단어가 이미 소모된 단어 같아 쓰기 싫다. 하지만 경계인, 가장자리, 변두리 같은 말들이 입에서 맴돌다 이방인이 가장 낫겠다 싶어 쓴다.
이십 대 초반, 동교동에서 약속이 있어 2호선을 타고 홍대입구역에서 내렸다. 당시의 나는 해외여행을 종종 가곤 했는데, 순간 여기가 해외와 뭐가 다르지 싶었다. 언어가 통하는 것이 크긴 하지만 나는 역 안의 인파 중 단 한 명의 취향도, 역사도 모른다. 순간 낯선 이국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이방인같이 느껴졌다. 나는 툭 튀어나온 사람이다. 웬만한 분야에 있어 통상적인 한국인과는 대화가 잘 통하질 않는다. 학창 시절에도, 대학에서도, 군대에서도 그랬다. 늘상 변두리를 맴돌았고 딱히 중심으로 가고 싶단 생각도 없었다. 보통의 한국인처럼 살아보려고 안 한 것도 아니다. 생긴 것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보자 시도했으나 거창하게 말아먹고 병만 얻었다.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내 기준으로 살아보자고 생각했다. 튀어나온 나를 깎아봤자 느는 건 담배뿐이었다. 별로 깎여 나가지도 않았고. 이렇게 살아보자 결심한다고 하루아침에 남의 시선에 무심해지는 것도 아니고 불안하지 않은 것 역시 아니다. 다만, 난 사람들 다 가는 길 가는 게 정말 안정적인 방식인가에 대해선 의문이 있다. 또 그렇게 살면 정말 불안하지 않은지도 의문이다. 난 삶에서 불안이란 건 제거할 수 없기에 차라리 익숙해지거나 당연하게 대해서 무심해지는 쪽이 마음 편하다고 본다. 까짓 거 이방인으로 살자. 나는 더는 나를 고갈시키고 싶지 않다.
세상 모든 것들이 알파메일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으로 존중받을 수 있기를. 그리고 나도 타인의 삶을 존중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