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P 인간에겐 죄가 없었어요.
(본 글은 아래의 연구 논문을 인용합니다.
INTP 인간과 사는 이야기를 주변에 하면 그래서 네 MBTI는 무어냐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매거진 글에도 저의 MBTI를 궁금해하신 독자님들이 계시고요. 사실 뭐든 상성의 문제일 것인데요. INTP 인간과 내가 유독 합이 맞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더러 하긴 했었습니다.
그런데, 궁합의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그냥 제가 문제였습니다.
부부 갈등으로 상담소를 방문한 부부들을 MBTI 유형별로 분류하고, 이들의 상태를 다각도로 분석한 논문의 결과입니다. ISTJ나 ESTJ인 아내들이 결혼만족도가 낮고, 이혼가능성은 높으며, 갈등조정방식 점수는 낮다고(낮을수록 갈등을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함을 의미) 합니다.
제 MBTI는 ESTJ입니다. INTP 인간과 살며 힘들었고, 오늘도 힘든 중입니다만 그저 '안 맞아서'라고만 생각했지, 나의 가치관이나 성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 적은.. 솔직히 없었습니다. 하지만 논문을 읽고 나니 스스로를 자못 심각하게 되돌아보게 됩니다. 논문 그 어디에도 INTP 남편이 문제란 이야기는 없었거든요. ISTJ와 ESTJ 아내들에게 유의한 수준으로 나타나는 특성들이 있어, 다른 MBTI 유형에 비해 결혼생활이 어려울 수 있음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죠. 네, ESTJ 아내인 저, 뼈 맞았습니다.
제가 특히 주목한 것은 '이혼가능성'이라는 것이었는데요. 본 연구에서 ‘이혼가능성’이란 이혼에 대한 생각을 하거나 이혼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나 상담자에게 말하는 등 이혼을 시도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지, 이혼 생각을 전연 안 하고 사는 기혼자가 세상에 있겠어...? 싶어 집니다. 하지만 ISTJ 나 ESTJ 아내들이 이런 생각이나 행동들을 다른 MBTI 유형에 비해 '유의한 수준으로' 많이 하고 산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과입니다. (진짜... 이런 생각 안 하세요?!)
이에는 여러 가지 성격적인 영향이 있을 겁니다. 논문에서는 ISTJ와 ESTJ 성향의 다음과 같은 특징 때문에 부부간의 갈등이 극대화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ISTJ/ESTJ 유형의 공통점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성격이며, 철저한 계획하에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특성을 보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유형은 자신의 논리적 사고를 지나치게 신뢰하여 감정의 가치, 즉 자신이나 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측면을 무시하기 쉬우며, 이는 그들 스스로 감정적인 해소를 하기 어렵게 만들고 상대방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나 감정적 이해가 부족한 맹점을 보일 수 있다(Williams & Tappan, 1995)
여기서 ESTJ인 제가 스스로의 사고구조를 생각해 보며 나름의 해석을 더해보자면 이렇습니다. ESTJ는 극히 효율 중심의 사고를 하고, 손익을 잘 따지는 유형입니다. 문제의 해결을 중시하고, 빠르게 승부를 보는 것에 가치를 둡니다. 그런데 부부간의 갈등이란 대개가 길고 지지부진하며, 일순간 해결된 듯 보이다가도 그 기저에는 잔잔하게 존재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 역시 아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서로 간의 감정을 잘 돌보며 행해져야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런 복잡하고 섬세한 과정 속에서 ESTJ인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까지 복잡하고 어려울 거면(내가 보기엔 비효율의 극치) 결혼생활이 엄청나게 만족스러워야 하는데(손익 따지기) 이게 맞아? 이렇게 사느니, 이혼하는 게 나은 거 아냐? 물론 아주 극단적인 예시를 든 겁니다. (제가 저렇게까지 성격파탄자스럽진 않습니다...) 하지만 ESTJ의 기질과 성향상, 결혼생활도 그 품질을 평가하려 들기 쉽고, 본인이 들이는 노력에 비해 결과가 좋지 않다면 과감하게 그만두려는 결정에 이르기가 상대적으로 쉬우리라 예상합니다.
이 연구에서는 워낙 ISTJ/ESTJ 유형과 타 유형 집단 간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나, 부부간 성격지표 상의 불일치에 대해서는 깊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즉, 다른 것보다는 ISTJ 혹은 ESTJ 인지 아닌지가 가장 중요한 변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도 논문을 읽으며 한편 위안을 받은 내용도 있습니다. J/P 지표가 다른 두 사람은 다른 지표가 불일치할 때보다 갈등 수준이 높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ESTJ 인 저와 INTP 인간도 바로 이 J/P 지표가 서로 다른 부부입니다. 이 부분은 단순 언급만 하고 있어서, 또한 제 나름의 해석을 얹어봅니다.
J는 판단형(judging) P는 인식형(perceiving)입니다. J 유형은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이를 즉각 실행하는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P 유형은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하고, 상황에 따라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에 가치를 둡니다.
제가 INTP 인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들은 대개 이러한 성향 차이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INTP 인간은 주말이나 여행 계획을 한 번 세워두고서는 수시로 바꾸곤 하는데요. 제 입장에서는 결정에 대한 불필요한 번복처럼 여겨져 스트레스이나, 그는 항시 더 나은 대안을 계속해서 찾아나가는 시도라고 주장합니다. J 형인 저는 한 번 결정한 것을 굉장히 폐쇄적으로 다루고 변동성을 제거하려 노력하지만, P 형인 그는 언제나 또다른 가능성을 열어두려 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이러한 성향 차이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일상을 늘 함께 영위해야 하는 부부 사이라면 굉장히 힘이 들 수 있습니다.
ESTJ가 이혼가능성이 높은 MBTI라고는 하나, 책임감도 그만큼 높은 유형입니다. 저 역시 힘든 것은 그 나름일 테고, 제가 결정한 것에는 책임을 다하며 성실히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배우자인 INTP 인간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더 깊이 알아야겠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격언을 늘 격전지인 직장 생활이 아닌 결혼 생활에서 느끼게 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인용한 연구 논문은 그 끝을 상호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를 통해 갈등 조정을 잘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로 맺고 있습니다. 논문을 읽으며 ESTJ 인간인 제가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 한 번 더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단점은 알고 있어요. 저도 제 자신이 싫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 더 해주어야 말과 행동을 한 번 더 가름해 보게 됩니다. 네, 오늘만큼은 기필코, 저와 함께 사는 INTP 인간에게 잘해주어야겠습니다.
덧
인용한 논문은 부부클리닉을 내담한 부부들의 성격 유형을 대상으로 한 연구입니다. 방문한 모든 사람들 중에 ESTJ 여성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고 하고요. 그런데 부부클리닉 방문 안 하고 그냥 이혼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그래도 ESTJ 들은 노력을 열심히 해보고 이혼한 이들이 아닐까요..? (급 변호)
INTP 인간과 살고 있습니다.
1화 : INTP 인간과 만 3년을 살았다?(인팁인간 전격해부해 드립니다.)
2화 : 반지가 대체 왜 3개인 건데?(결혼반지 없는 결혼)
3화 : 난 그분들과 그렇게 친해질 수 없어(그분들 우리 엄마 아빠랍니다.)
4화 : 제발 좀 치우고 살자(INTP 인간에게 정리정돈이란?)
6화 : 네가 나랑 결혼해서 불행한 것 같아(INTP 인간이 눈물 흘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