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굿모닝, 영할아버지
밤과 새벽 사이, 가장 고요한 틈이 지나가고 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물들인다.
하늘이 변하면 공기의 색도 함께 달라진다. 차갑지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그 경계가 스며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영할아버지는 눈을 뜬다.
‘조금 더 자야 해.’
그는 다시 눈을 감아본다. 나이가 들수록 잠드는 것도, 늦게까지 자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오늘만은 다시 잠을 청해본다. 오늘은 긴 여행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딸과 손녀가 기다리고 있으니, 허투루 늦을 수는 없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창문으로 스며든 공기가 한층 밝아져 있다. 새벽은 이미 지나갔다. 깊이 잠든 것이 아니었기에, 개운함보다는 늘 익숙한 아침의 피로가 먼저 다가온다.
그는 마른 세수를 하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바로 일어서기엔 팔과 다리, 허리가 동시에 항의한다.
‘이봐, 뭐 그리 서두는 거야. 천천히 좀 하자구.’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스트레칭을 한다. 운동 같아 보이지 않는 동작은 묘하게 한국 무용을 닮아 있다. 그만의 특별한 방식.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의식 같은 몸짓이다.
조용한 거실로 나와 전기포트에 물을 올린다. ‘보글보글’ 소리가 차오르면 스위치를 내리고 코드를 뽑는다. 오래된 습관이다. 티 박스를 꺼내 포장지가 제각각인 차들을 훑어보다 장미차 하나를 고른다. 작은 티백이 따뜻한 물에 잠기자 은은한 향이 솔솔 퍼진다.
그는 책 한 권을 펼쳐 짧은 독서로 아침을 연다. 베란다 밖 유치원차의 소리, 분주한 새들의 울음이 세상이 깨어남을 알린다. 그렇게 차 한 잔을 끝내고, 책을 덮는다.
푸석푸석한 수염을 면도하고, 하얀 머리를 빗질하며 거울 속 자신에게 웃어본다.
“아직 머리가 풍성하군. 이 나이에 이 정도면 훌륭해!”
책장에 꽂혀 있던 비닐 포장이 빳빳한 레코드판을 꺼내 잠시 바라본다. 흐뭇한 미소가 비닐에 비친다.
‘딸아이가 좋아할까? 그래, 좋아하겠지.’
레코드판을 종이가방에 정성스럽게 넣고 신발장 거울 앞에 서서 배낭을 메고 종이가방을 들어본다. 그러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굳게 다문 입술이 씰룩댄다. 그는 배낭을 다시 풀어 종이가방을 조심스럽게 접어 넣는다.
“흠… 훨씬 낫군.”
짐싸기는 끝났다. 낡았지만 단단한 배낭은 현관 앞에 놓인다.
그는 부엌으로 돌아가 세월의 흔적이 묻은 후라이팬을 꺼내 달군다. 브로콜리, 당근, 양배추가 가지런히 채 썰린 반찬통을 열고, 올리브유에 채소와 달걀, 토마토를 달달 볶는다. 오래된 무늬의 접시를 꺼내 담는다. 분명 돌아가신 할머니의 취향일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음식을 앞에 두고, 그는 연하게 탄 커피 한 잔을 곁들인다.
‘딸아이가 이 커피를 보면 또 무슨 맛이냐고 투덜대겠지.’
‘그래도, 내 입엔 제일 맞는걸.’
접시에 남은 달걀과 토마토를 한입에 쓸어 담고 식사를 마친다. 설거지는 식은 죽 먹기다. 후라이팬은 키친타월로 닦고, 접시와 젓가락은 금세 씻어낸다. 먹고 바로 치우는 것 역시 그의 오랜 습관이다.
화장실에서 로션으로 피부를 진정시키고, 귀 뒤까지 꼼꼼히 씻는다. 빗으로 하얀 머리를 고르며 거울 속 자신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옷장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바지 한 벌과 티셔츠 두 장, 양말 한 켤레. 언제나 입던 실용적인 차림이다. 양말을 신고 배낭을 멘다. 벙거지 모자는 요즘 키링처럼 달고 다닐 수 있어 더없이 유용하다.
마지막으로 부엌에서 보온병에 물을 담아 챙기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다.
현관문은 망설임 없이 열리고, 이른 아침 시원한 공기는 그의 뺨을 스친다.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