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청년
버스정류장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모두들 핸드폰만 바라본다.
이른 아침, 다들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는 모양이다.
‘젊은이들은 갈 곳이 많아서 좋겠구만.’
좋을 때다 싶은 표정을 살며시 지으며 영할아버지는 정류장에 자리를 잡고 선다.
키는 점점 작아지고 살은 자꾸 빠져 옷들이 커지지만, 허리만큼은 여전히 꼿꼿하다.
두 다리에는 힘이 들어 있고, 등에는 오래도록 함께한 낡은 배낭이 안정적으로 붙어 있다.
핸드폰을 바라보던 한 청년이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했다.
“여기 앉으시죠.”
“괜찮아요, 앉아요.”
청년은 머쓱했는지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자신이 자리 양보하지 않은 것에 묘한 공기가 흘렀다.
다른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할아버지는 양보의 마음만 받는다.
‘아직 내 다리는 쓸 만하다고.’
버스가 오는 방향과 전광판을 확인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끼이익—
버스가 브레이크를 잡는 소리.
그들 앞에 버스가 멈췄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교통 요금 혜택을 오래오래 누리려면 튼튼하게 나이를 먹어야 한다.
이런 혜택을 두고 몸이 아파서 누리지 못한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안녕하세요.”
버스기사가 가볍게 인사를 한다.
이른 아침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힘이 되는 말이다.
삑—
삑—
삑—
사람들이 버스에 탔다.
버스기사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로 인사하는 손님들도 있다.
영할아버지도 그 버스에 탔다.
버스는 만석이 아니어서 자리가 몇 개 남아 있었다.
시외버스라 좌석은 나란히 두 자리씩.
영할아버지는 창가보다 복도석을 선호했다. 내릴 때 편하기 때문이다.
창가에 앉아 비어 있는 자리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덩치 큰 아주머니, 짧은 치마 차림의 아가씨, 졸고 있는 아저씨, 장을 보고 돌아오는 할머니…
각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자리는 없었다.
역까지는 한참을 가야 했다.
영할아버지는 뒷문 가까이 두 자리 모두 비어 있는 좌석을 골라 앉았다.
뒤따라온 그 청년은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앉았다.
버스정류장에서 자리를 양보하려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자리도 많은데….’
영할아버지는 생각했다.
그 청년과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유리에 닿을 듯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나이가 드니 혼자 조용히 다니는 게 더 편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청년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말을 걸었다.
“혼자 앉기 심심해서요, 어디 가시나 봐요?”
‘내 속마음이 티가 났나?’
괜히 뜨끔해서 그랬을까. 평소였으면 대답을 안 하거나 짧게 ‘네’ 하고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을 텐데.
버스정류장에서 그래도 안면이 있는 청년이었기에 대답했던 걸까.
다시 생각해보면 영할아버지도 그때 자신답지 못했던 것 같다.
“손녀 집에 가요.”
영할아버지의 대답에, 기다렸다는 듯이 청년은 말을 이어갔다.
“와, 좋으시겠다! 어디로 가세요?”
“동해.”
“바다 있는 데죠? 멀리 가시는 거네요?”
“가는 길이 여행이다 생각하고 가면 금방이죠.”
“저도 여행 가고 싶네요. 요즘 회사-집만 반복이라.”
“출근하는구만.”
“얼마 전까진 취준생이었는데, 취업하고 나니 쉬고 싶네요. 하하.”
“허허, 다 그렇지 뭐… 축하해요.”
“네?”
“취업.”
“아, 감사합니다.”
‘출근해도 지금이 좋을 때야.’
말을 하고 싶었지만, 괜히 ‘꼰대 할아버지’ 같을까 봐 소리 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집에 혼자 있어서 그런 걸까, 대화하는 법을 까먹어간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방법이 어렵고 조심스러워 침묵을 선택한다.
그런 영할아버지에게 갑자기 나타난 이 청년은 착한 것 같지만 시끄럽다.
버스는 강을 건너고, 터널을 몇 번 지나 도심으로 들어섰다.
강물에 반짝이는 윤슬이 예쁘지만 눈이 부셨다.
잠깐의 고요함을 깨는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자리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항상 이 시간에 타는데 사람이 많아 서서 갔거든요.”
“출근 시간이라 사람이 많았겠네요.”
“다들 휴가 갔나 봐요. 하하하.”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영할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도 무척 덥겠어요.”
청년은 창밖을 보며 웃었다.
“회사에 에어컨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하하.”
“휴가는 언제인데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먼저 제출한 분들 다녀오시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신입의 서러움이구만.”
“맞아요, 아직은 짬밥이 안 되네요. 휴가 때 말씀하신 동해 바다 가봐야겠어요.”
“젊은 사람이 더 좋은 데 많이 알 텐데, 해외도 요즘 많이 다니던데, 다 늙은 노인이 뭐 좋은 데 젊은이들보다 알겠어?”
“버스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추천한 여행지라고 생각하니 왠지 더 매력 있는 것 같아요.”
청년의 따뜻한 말 때문일까. 무뚝뚝한 영할아버지는 조금 경계가 풀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청년과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었다.
‘요즘 이런 청년도 있구만.’
젊은이가 나이 든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게 신기했다.
그런 젊은이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굴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하, 작은 동네라서 그렇지만 참 멋있다고 생각해요. 해안도로로 가는 길도 좋고, 동네가 아기자기해요. 묵호도 꼭 가봐요 그럼.”
“꼭 가볼게요! … 아, 저 이제 내려야 해요. 너무 반가웠어요. 여행 잘 다녀오세요!”
“그래요, 고마워요. 출근 잘해요.”
버스 뒷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청년은 사라졌다.
그가 내리고 난 뒤, 영할아버지도 벨을 눌렀다.
‘덕분에 시간이 잘 갔네.’
할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씨익 웃고 있었다.
‘참, 재미있는 일이야.’
버스 뒷문이 닫히자, 영할아버지를 남기고 버스는 떠났다.
멀어지는 소리를 등 뒤에 둔 채, 그는 역 앞에 서서 시간을 확인했다.
“딱 맞춰 도착했군.”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영할아버지는 작아진 어깨에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가볍게 경쾌한 발걸음으로 역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