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2] 콰트로 칸티 주변 산책
부산에서 팔레르모까지 긴 시간을 무리해서 이동하느라 피곤이 쌓였는데도 다음날 아침에는 새벽 같이 잠에서 깼다. 숙소 맞은편 카페가 문을 열기를 기다려 일착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조식은 크라상 1개와 카푸치노가 전부다. 원래 이탈리아인들은 아침을 잘 안 먹는다더니 ‘먹는 게 남는 거다’를 삶의 좌우명으로 삼는 나에게는 조금 실망이었다.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호텔에 따라 푸짐한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시칠리아에선 시칠리아식 전통에 아주 충실한 모양이다.
거리의 좌석에 앉아 주변 풍경을 구경하면서 카푸치노의 향을 음미했다. 숙소와 카페 바로 앞을 지나는 거리가 팔레르모의 중심지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다. 처음으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건설한 위대한 왕의 이름을 딴 거리이자 팔레르모의 주 도로인 만큼 왕복 6차선 정도의 대로에 키가 큰 가로수와 기념물이 장식된 웅장한 도로를 예상했다. 그런데 행인들로 북적이고 간간이 그 사이를 차가 비집고 지나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한국의 주택가 이면도로였다. 팔레르모의 유명 관광지는 대부분 이 거리 주변에 있다.
10월의 시칠리아는 한여름 날씨였지만 아침에는 그래도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을 하다가 숙소 주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주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어 잠깐 들를 수 있는지 문의하니 10시에 사람을 보낸다고 한다.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온다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이 같은 건물에 있다고 하는데 일처리 하는 게 딱 시칠리아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두르는 법도 없고 계획대로 되는 일도 없으며, 차질이 생겨도 미안해하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도 없는 이 풍토는 떠나는 날까지도 적응이 안 됐다. 정작 일을 처리하는 데는 2-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른 시간부터 서둘렀는데도, 본의 아니게 11시가 넘어서야 숙소를 나섰다. 숙소를 구도심 중간에 잡으려고 신경을 쓰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지척에 유적이 널렸다. 아침에 화장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아래로 왠 낡은 붉은색 건물 지붕이 보이길래 그런가 했더니 성 마테오 성당이라고 팻말이 붙어 있다. 관광용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이 거대한 성당의 건립 연도가 무려 1632년이었다. 팔레르모에서는 수많은 과거의 유적이 주민의 생활공간과 나란히 뒤섞어 존재한다.
성 마테오 성당을 지나 작은 계단으로 올라가니 광장이 나오고 그 가운데에 그리스 풍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프레토리아 분수대가 오전 햇살 아래에서 시원하게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 분수대는 16세기 중반에 토스카나 출신 조각가의 작품으로 원래 피렌체에 있던 것을 팔레르모 의회가 구입해 이곳으로 옮겼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 분수대는 올림푸스의 신, 괴물, 동물 등 온갖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분수대 주변에는 산타 마리아 델 라마릴리오 성당(흔히 마르토라나라 불린다), 산 카탈도 성당 등 고풍스러운 건물이 둘러싸고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광장에서 나지막한 계단만 내려서면 네 거리 공간이 나오는데, 빌리에나 광장이 정식 명칭이지만 흔히 콰트로 칸티라고 불린다. 구도심에서 동서를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인 엠마누엘레 거리와 마퀘다 거리가 교차하는 사거리 건물 모서리에 조각 분수대를 세운 거다. 이 네 모퉁이 기념물을 기준으로 네 군데 행정구역이 나누어진다.
이 네 거리에서 각 모서리의 조각은 3층으로 되어 있다. 맨 아래층의 조각은 각기 4계절을 상징하고 그 위 층에는 시칠리아를 지배했던 4명의 스페인 왕의 조각을 세웠다. 계절을 상징하는 조각은 언뜻 구체적인 인물상 같지만 계절의 속성을 나타내는 알레고리의 성격을 띤다. 3층엔 산타 올리바, 산타 크리스티나, 산타 아가타, 산타 닌타 등 시칠리아 성녀 4명의 조각상을 올렸다.
시칠리아에서는 오래전 그리스의 여신 아테네를 숭배했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시칠리아인들은 곳곳에 성모나 성녀 등 여성의 이름을 딴 성당을 짓고 과거의 여성 숭배 전통을 이어간 듯하다. 이 구조물은 1621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4백 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팔레르모 주민들의 나들이 공간 구실을 충실히 한다. 시칠리아에서는 유적이 울타리를 친 보존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부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