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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그리고 나

2025년 6월 19일

by So

<여름, 기록>을 만들면서, 유독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는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TV 앞에 앉지 않아도 어디에서도 영화를 보고, 방송을 본다.

감독이 아니어도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고,

언론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현실을 담아 다른 이에게 공유할 수 있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지금의 시대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처음 다큐를 시작할 때엔 ‘다큐를 만드는 나’라는

자아에 도취된 적도 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짐을 내가 다 기록할 수 있는 것처럼. 그랬던 적도 있다.

카메라는 무엇보다 신성하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졌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월호 이후, 내 생각도 삶도 일도 모두 바뀌었다.

나의 카메라가 이토록 무기력할 수 있다니.

아무리 애를 써도 진실에 다가가는 것에 내 카메라는 별 도움이 안 됐다.

그즈음 난 <방문>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이제 막 100일이 된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그냥 모든 것이 무기력했고, 깊고 긴 슬럼프를 맞이했다.


동료들의 도움과 응원으로 꾸역꾸역 2018년 <방문>을 마쳤다.

마지막 영화제 상영 때, 영화를 보며 펑펑 울었다.


‘내가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다들 너무 애써주었는데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한 것은 맞을까. 영화는 나 혼자 만드는 일이 아니구나.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난 다시, 조급해졌고 초조해졌다.

무엇이라도 만들지 않으면 떠내려 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여름’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의 편지는 나에게 꼭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었는데도, ‘괜찮아. 천천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날부터 그녀의 삶을 상상했다.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말.

’더 이상 나와 같은 인생의 비관자가 생기지 않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그 염원은 어떤 마음으로 쓸 수 있는 것일까.


그녀의 삶을 상상하며, 나는 그동안 내가 눈감았던 많은 여성들의 삶들을 하나씩 적어나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일을 하자.‘

‘일을 하는 나.’

’ 무기력이 찾아와도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일을 하자.‘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기록을 하며 나라는 사람의 삶이라도 바꿔보자.‘

‘함께 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며, 그 감사함을 잊지 말고, 조금 더 부지런히 일을 하자.’


다큐멘터리가 쫓아야 하는 진실은 가려진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쫓을 수 있는 진실은 하나다.

‘산다, 살아간다.’

내가 지금을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 외에는 우리는 그 무엇의 진실도 알 수 없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일’로 받아들이고, 더 큰 의미들을 부여하지 않음은...

그동안 내가 지나쳐 온 목소리들과 얼굴들에 대한 반성이다.


내가 사는 오늘은 그들의 죽음으로 조금 더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늘 조금 더 부지런한 사람이 되고자 함은, 그런 이유다. (물론,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일로 생각하고 조금 더 부지런히 하기로 했다.

더 열심히 상상하고, 바라보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고 들으려 한다.


달리기가 싫어도, 꾸역꾸역 오늘의 달리기를 채우듯.

힘들 때 걷고 가뿐할 때엔 조금 더 달리듯이.

오늘도 조금 더 부지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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