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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Nov 27. 2023

이조말엽의 정치와 천주교도의 횡포

이재수 실긔, 夜月의 漢拏山

李朝末葉의 政治와 天主敎徒의 橫暴
-이재수의 손아래 누이 이순옥이 말하고(述), 제주도 한경면 낙천리 서당 훈장 출신 조무빈이 받아 쓰다(記).  


리조말엽(李朝末葉)의 상태는 정치(政治)가 심(甚)히 문란(紊亂)하야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은 무고(無故)한 백셩을 별별 죄명으로 얼커¹ 재물(財物)을 늑탈(勒奪)²하며 소위(所謂) 량반(良班)내란 분들은 아모 선생의 10대손이니 자긔선조의 뼈를 팔아 향촌농민(鄕村農民)에게 무리한 횡포가 날날이 늘어저서 슌랑(純良)한 백셩들은 생활의 길을 일케되얏다.


그 반면에난 저- 외국사람들은 자긔내의 욕망을 좀 최워보랴고 회(會)이니 교(敎)이니 가면적(假面)적으로 취지만 훌융한 간판을 가지고 삼쳔리 강토를 암즁규시(暗中窺視)³하고 잇섯다.


성교(聖敎)라나 쳔주교(天主敎)라나 저- 멀고 먼 불란서로부터 죠선에 침입한 지 불과 수년에 그- 교도는 전 죠선에 편만(遍滿)⁴하야 심지어 환해절도(環海絶島)⁵인 제쥬도까지 밋처 그의 세력은 장차 제쥬도 일폭(一幅)⁶의 땅덩어리를 하로 아츰에 잡아 먹을 것갓치 불국인(佛國人) 선교사 구(具)마실⁷ 문제만(文濟萬)⁸은 제쥬성(濟州城) 즁(中)에 교당(敎堂)을 건설하고 정의(㫌義)⁹와 홍로(烘爐)¹⁰에 지소(支所)를 설치하야 그- 형세는 츙천(衝天)의 세력을 가진 것 갓햇섯다.


권리를 조화하고 세력에 붓좃치난¹¹ 향촌불량(鄕村不良) 파락호(破落戶) 잡류배(雜流輩)들은 조흔 긔회(機會)나 만난 것갓치 서로서로 손목을 이끌어 호상향응(互相響應)하야 날날이 교도가 느러갓다. 교도가 느러갈수록 교당이 협(狹)착하야 각촌각리(各村各里)에 분회소(分會所)이니 분교소(分敎所)이니 하난 쳔주교(天主敎) 긔(旗)발은 완연한 불란서(佛蘭西) 제쥬도로 화(化)하고 말엇다. 그럼으로 교도(敎徒)들의 행동은 천쥬교 선교사(宣敎師) 구마실(具瑪瑟) 문제만(文濟滿)을 빙자하고 량가(良家)의 부녀를 능욕(凌辱)하며 금전을 편취(騙取)할 뿐 안이라 교당(敎堂)과 밋 분교소(分敎所)에서는 제쥬도 인민에 대하야 민형사(民刑事) 치리권(治理權)¹²까지 가지고 사형(私刑)을 임의(任意)로 사용하며 교도와 일반민즁 사이에 애자지원(睚眦之怨)¹³이 잇을지라도 교도들은 위력을 확장코저 긔어이 보복수단을 취한 연후(然後)에야 말엇섯다.


교도의 무리한 횡포난 날이 가면 갈사록 치장(鴟張)¹⁴이엿다. 도내(島內)에 수쳔년 금양(禁養)¹⁵인 천년송(千年松) 만년평(萬年彭)¹⁶까지 자유(自由) 작벌(斫伐)¹⁷하야 분회소 분교소 건물에만 사용할 뿐 안이라 시장에 매츌(賣出)하야 저의 사복(私腹)만을 채우며 민가에 츅복기도(祝福祈禱)¹⁸ 등을 일절 엄금파괴하고 수십년 전에 척매(斥賣)¹⁹한 토지를 륵환(勒還)²⁰하며 언쟁 끝에 사람을 총살하난 등 별별 허다한 일은 일일이 긔록할 수 업다.


아- 참 시일(是日)은 갈상(曷喪)고 여급여(余及汝)로 해망(偕亡)이라²²난 말과 갓치 제쥬도 일반 인민의 울분한 마음은 거의 폭발될 지경이다.


때에 목사(牧使) 리상규(李庠珪)²³난 갈녀가고 군수(郡守) 김창수(金昌洙)난 목사의 대리(代理)로 도내(島內) 행졍을 겸님(任)하얏다.


그러나 쳔주교도의 란포(亂暴)²⁴와 선교사의 위력을 조금도 제어할 수 업서 다만 시위소찬(尸位素餐)²⁵할 뿐이다. 선교사 구마실은 교도들을 다리고 옥문을 임의로 깨트려 정배죄인(定配罪人) 리범쥬(李凡周)²⁶ 무리를 방츌(放出)하얏다. 리범쥬난 즉 쳔주교도의 일분자(一分子)이엿다.


그들의 행동은 그- 얼마나 국법을 무시하며 죠정명관(朝庭命官)을 멸시하난지 군수(郡守) 김창수(金昌洙)난 울분(憤)한 마음을 참지못하야 곳 사직(辭免)까지 하고저 하얏다.


때난 신츅년(辛丑年) 츈삼월(春三月)이다. 부드러운 봄바람에 천연적(天然的)으로 어엽분 꽃은 자연적(自然的) 피여 웃고 어유하 어유하(魚游河 魚游河)²⁷ 저- 맑은 물에 잠잠부부침(潛潛浮復沈)²⁸ 금리어(金鯉魚)²⁹난 제- 자의굿³⁰ 자무락질³¹하것만은 우리 제쥬도 사람들은 자유를 일코 생계가 막연(漠然)하엿다. 그럼으로 남녀로소는 한로산신령(漢拏山神靈)의게 향하야 주야로 하소연하얏다.


<옮긴이 註>

¹얼커-얽어

²늑탈(勒奪)-폭력이나 위력을 써서 강제로 빼앗음.

³암즁규시(暗中窺視)-비밀리에 들여다보다.

⁴편만(遍滿)-널리 꽉참.

⁵환해절도(環海絶島)-바다로 둘러싸인 머나먼 섬.

⁶일폭(一幅)-베나 그림의 한 폭 또는 한 장.

⁷구(具)마실-파리외방선교회 소속으로 한국명 구마실(具瑪瑟1871~1929), 본명은 마르셀 라쿠르(Pr. Marcal Lacrouts)이다. 1900년 6월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의 후임으로 제주도로 들어와 신축항쟁을 겪었다.

⁸문제만(文濟萬1876-1957)-파리외방선교회 소속으로 문제만(文濟萬)은 한국 이름이고, 본명은 뭇세(Jean-Germain Mousset)이다. 1901년 제주에 입도해 구마실과 함께 선교 중 신축항쟁을 맞았다.

⁹정의(㫌義)-지금의 서귀포시 일대지역으로 읍치(邑治)는 표선면 성읍이며 종육품 현감이 자리했다. 조선시대 제주에는 행정구역으로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靜縣), 정의현(㫌義縣)이 있었다.

¹⁰홍로(烘爐)-서귀포시 서홍동의 옛이름.

¹¹붓좃치다-붙좇다(들러붙다. 섬기어 가까이 다르다)

¹²치리권(治理權)-통치권(統治權)

¹³애자지원(睚眦之怨)-눈을 흘겨보는 정도의 아주 작은 원망(怨望)

¹⁴치장(鴟張)-소리개가 날개를 활짝 폈다는 뜻으로, 기세가 등등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¹⁵금양(禁養)-나무나 풀을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여 키움.

¹⁶만년평(萬年彭)-만년된 팽나무.

¹⁷작벌(斫伐)-나무를 찍어서 베어 냄.

¹⁸츅복기도(祝福祈禱-여기서는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소원을 빌어서 가호를 비는 의식.

¹⁹척매(斥賣)-헐값으로 마구 팖.

²²시일(是日)은 갈상(曷喪)고 여급여(余及汝)로 해망(偕亡)이라-오늘은 언제 없어질꼬? 내 너와 함께 다 망하리라. 書經의 商書 제1편 湯誓 3장에 있는 글임.

²³리상규(李庠珪)-제주민에게 사사로이 세금을 남발하여 자기 재산을 챙긴 탐관 목사(牧使)로 이름을 남김. *대한제국의 무신으로 고종황제 때의 제주목사. 광무3년인 1899년 10월, 박용원(朴用元)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901년 1월에 면직되어 떠났다. 당시의 제주군수는 김희주(金熙冑), 김창수(金昌洙)이며 정의군수는 김재용(金在鏞)이고 정의현감은 채구석(蔡龜錫)이다. 목사 이상규가 재임 중인 1900년 봄에 총물당(摠物堂)을 중수, 이해 가을에 흉년이 들었다. 또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이 1900년에 내도, 세금 수납을 남발할 뿐만 아니라 혹독한 방법을 써서 다스리자 도민으로부터 원성의 소리를 들었다. 목사로 도임 20일 만에 감춘 돈이 6만 량(兩)이 된다는 말이 유포되었다. ‘왕조실록(王朝實錄)’, ‘고종시대사’, ‘관보’ 등에 의하면 1899년 9월 이상규를 제주목사로 임명, 제주목재판소 판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1900년 12월 목사 이상규를 해임, 이는 본부 시찰관 정유섭(丁裕燮)의 보고서에 의해 해당 관원이 횡렴(橫斂)하면서 공용이라고 했음은 모두 명백한 사실이어서 파면되었다.

²⁴란포(亂暴)-난폭(亂暴)의 본딧말.

²⁵시위소찬(尸位素餐)²⁵-시동의 공짜밥이란 뜻으로, 하는 일 없이 국가의 녹을 축내는 정치인을 비유한 말. 한서(漢書)의 주운전(朱雲傳)에 나오는 말이다.

²⁶리범쥬(李凡周)-당시 제주도 유배인이었던 김윤식이 기록한 ‘속음청사’에는 광무 5년(1901년) 3월 18일에 라크루 구마실 신부가 구속돼있는 유배 죄인 중 이범주는 천주교인이므로 풀려나야 한다고 강력하게 청하며, 제주 목사가 허락하지 않는데도 기어이 옥문을 부수고 이범주를 풀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²⁷어유하(魚游河) 어유하(魚游河)-고기가 물 위에서 자유롭게 노는 모양

²⁸잠잠부부침(潛潛浮復沈)-물고기가 물 위아래로 헤엄치며 조용히 노니는 모양

²⁹금리어(金鯉魚)-금빛 잉어

³⁰제- 자의긋=제- (自意)긋-제 마음껏

³¹자무락질=무자맥질-물속에서 팔다리를 놀리며 떴다 잠겼다 하는 짓

영화 <이재수의 난> 스틸컷

[신축항쟁 뒷이야기] 천주교 제주포교의 시초

·김태능 著 <濟州島史論攷> 글 중 발췌. p321~322


-제주도 포교의 경위(濟州島 布敎의 經緯)

제주도에 천주교가 전래한 것은 한국에서 포교의 자유를 얻은지 십수년이 지난 광무 2년(1898년)에 육지에서 영세 입교한 현 중문면 색달리(色達里) 출신 교도(敎徒)인 ‘양(梁)베두루’¹가 고향에 들어와서 ‘신(申)아오스탕‘²의 네 가족과 현 대정읍(大靜邑) 보성리(保城里) ’김(金)생원‘과 ’강(姜)도비아‘에게 전교한 것이 처음이 되는 것이다.


(1898년 4월) 이 교도들은 당시의 조선교구장 무텔 주교에게 제주도에 신부(神父) 파견을 열심으로 요청하였다. 무텔(閔) 주교는 이에 응하여 그해에 불국(佛國人) 배(裵)칼목³ 신부와 김(金)아오스탕(元永) 두 신부를 제주 본당신부(本堂神父)에 임명하고 이섬에 보내어 전교사업에 착수케 하였는데 이 두 신부는 1898년 12월부터 본거(本據)를 제주에 두고 전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안되어 배(裵)신부는 기후풍토(氣候風土) 등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타지방에 전임되고 그후 광무4년(1900년)에 다시 불인(佛人) 신부 문제만(文濟萬 제마노 뭇세)과 구(具)마슬(라크루스) 등 두 신부가 제주에 파견되어 와서 김(金) 신부와 더불어 3인이 전교에 종사하였는데 교회본당(敎會本堂)을 주성내(州城內)에 두고 정의군(旌義郡) 홍로리(烘爐里)⁴에도 교회를 두었으며 중요한 각 촌리(村里)에는 분회소(分會所)인 공소(公所)를 두어 전교에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광무5년(1901년 신축년) 봄에는 2백 여명의 신도가 세례를 받았고, 이외에도 입교 준비자가 천 여명에 이르게 되어⁵ 교세가 급속도로 발전되어 나갔다.


신축년(辛丑年 1901년) 양(陽) 4월말경부터는 구(具)신부는 제주읍(濟州邑) 성당에서 전교하고 김(金)신부와 문(文)신부는 미구(未久)에 타 지방에 전임되었다. 이때 포교의 내용과 방침은 교리(敎理)에 치중하여 질적(質的)으로 교도(敎徒)를 획득(獲得)하였다는 것 보다는 양적(量的)으로 발전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많은 입교자(入敎者) 중에는 이기적인 입장을 취하여 강대국인 불인(佛人) 신부에 의지하고 아부함으로써 그의 세력과 교회의 권력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고져 하는 불순부패분자(不純腐敗分子)와 불량도배(不良徒輩)들이 선량한 교도(敎徒)들 속에 섞여 있어서 민중들에게 이하(以下)에서 상승하려는 각종 횡포(橫暴)를 자행하여 민원(民怨)을 일으켰으므로 민중들이 분개하여 교도들을 상대로 무장봉기함에 이르러 선량한 교도들까지도 옥석구분(玉石俱焚)⁶의 참화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민란(民亂)을 세칭 신축년 이재수난(李在守亂) 혹은 성교난(聖敎亂)이라고도 부르며 이 까닭에 모처럼 발전도상에 있던 교세도 한동안 정체상태에 빠졌다고 한다.⁷ <참고서적> 한국천주교연감 제주교실기(韓國天主敎年鑑  濟州敎實記) 「제주도에 있어서의 천주교 박해」


<옮긴이 註>

¹양(梁)베두루-양용항(베드로)

²신(申)아오스탕-신(申)아오스딩 *천주교 신자가 제주도에 처음 들어 간 것은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한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의 부인 정명연(丁命連 마리아, 일명 蘭珠)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정 마리아가 이곳에서 전교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으로는 1857년 경 제주도 출신의 사공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이 중국 광동에 표류하다가 홍콩에서 조선인 신학생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 1860년까지 약 20명을 개종시켰으며, 1866년 사망할 때까지 제주에서 전교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병인박해 이후 제주의 신자들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30년이 지난 1898년 중문면(中文面) 색달리(穡達里)에 사는 양용항(베드로)가 육지에 머무를 때에 영세하여 제주에 돌아와서 신씨 형제(아우구스티노와 바울로), 보성리(保城里) 김생원과 강씨(토비아)에게 전교하였다. 그 결과 4가문이 열심히 수계하며 신부 오기를 고대하던 중, 1899년 5월 페네(C. Peynet 裵加祿)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정식으로 제주도에 파견됨으로써 본격적인 전교활동이 시작되었다.

³배(裵)칼목-카를로 페네(C. Peynet)신부로, 한국명 배가록(裵加祿).

⁴홍로리(烘爐里)-지금의 서귀포시 서홍리(西烘里). 온주 밀감은 1901년 서홍동 소재 천주교 서홍성당(현 복자수도원)에 근무하던 프랑스 Esmile J. Taque(한국명:엄타가) 신부가 왕벗나무 자생지가 제주임을 세계 식물학계에 보고하고, 1911년 제주자생 왕벗나무 몇 그루를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준 답례로 온주밀감 14그루를 받아 재배시험삼아 기르게 된 것이 제주 온주밀감 재배의 시초이다.

⁵한국천주교연감 참조

⁶옥석구분(玉石俱焚)-옥과 돌이 모두 불에 탄다는 뜻으로, 선악의 구별 없이 함께 화를 당함을 일컫는 말.

⁷구(具)마슬, 문(文)제만 두 신부는 당년 말경 다시 전교차 입도함.


1898년 배 신부(Pr. Pynet)가 매입한 제주도 최초의 사제관 (옛 신성여고 정문자리에 있었다)

1898년 배神父(Pr. Pynet)가 매입한 건물인데, 현 제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중앙성당 자리에 있었다. 사진 속 왼쪽 두 인물은 구마실(Pr. M. Lacrouts) 신부와 엄다케(Pr. Taquet) 신부다. 자신들이 만들어 준 나무공으로 공놀이를 하는 아동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1914년 6월 구마실 신부의 송별기념 촬영
구마실 신부(Pr. Marcel Lacrouts)의 모습-1900년부터 1914년 6월까지 제주도 신축민란 겪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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