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쪽박, 중소기업 중박, 중국 대박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러우전쟁은 개전 초기 러시아의 승리로 신속하게 끝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깬 우크라이나의 선전으로 아직 진행 중이다. 그리고 현재는 양측 모두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가지 못한 채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반복하고 있다.
비록 러우전쟁의 무대는 우크라이나 영토로 한정되어있지만, 전쟁의 영향은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겪고 있다. 세계 6위 밀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와 천연가스 및 석유 생산 국가인 러시아의 전쟁은 세계적인 식량 가격과 에너지 가격의 상승을 야기했다. 필수 자원인 식량과 에너지 가격의 상승은 역사적인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다.
러우전쟁은 인플레이션뿐만 아니라 기업들의 생태계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러시아와 관련된 수출입 제재를 시행했고, 러시아 정부와 관련된 러시아 은행들과의 거래를 금지했다. 이러한 제재는 한국 기업들을 비롯한 중국 기업들의 생태계 변화를 가져왔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대기업은 쪽박, 중소기업은 중박, 중국은 대박
우선 기업 규모별 러우전쟁 전후의 러시아 수출실적을 보면 한눈에 대기업의 심각한 피해를 알 수 있다.
코로나 직전까지 증가 추세였던 대기업의 러시아 수출은 코로나 때 잠시 주춤한 이후 2021년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2021년 수출금액 59억 달러는 코로나 이전 최고금액 43억 달러(2019년) 대비 약 37% 성장한 놀라운 규모였다. 하지만 러우전쟁이 발발한 2022년 대기업의 러시아 수출은 27억 달러로 전년 대비 55% 급감했다. 대기업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중견기업도 2021년 대비 2022년 러시아 수출이 24% 감소했다.
반면에 중소기업의 러시아 수출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였으며, 2021년 대비 2022년 수출은 2%밖에 감소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대기업이 주로 수출하는 품목이 제재 대상에 해당하였고 중소기업이 수출하는 품목은 비교적 제재에서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관세청에서는 '기업규모별 러시아 수출금액'과 '품목별 러시아 수출금액' 자료는 제공한다. 하지만 '기업규모로 구분한 품목별 러시아 수출금액' 자료는 공개하지 않기에 기업규모 구분 없이 품목 기준으로 러시아 수출을 살펴봄으로써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주로 어떤 품목을 수출하는지 간접적으로 유추해보자.
1.자동차(신차, 중고차) 수출
우선 한국의 대표적인 러시아 수출품목이었던 자동차, 그중에서도 신차의 엄청난 수출규모 감소가 눈에 띈다. 2021년 25억 달러였던 신차 수출금액은 2022년 4억 달러로 86% 급락하였다. 이 같은 하락의 피해자는 현대차와 기아차다. 러우전쟁 직전 현대차와 기아차는 러시아를 기점으로 유럽시장을 공략하기 위하여 러시아에 큰 규모의 설비투자를 하고 있었다. 이 결과로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차는 점유율 2위, 기아차는 점유율 3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러우전쟁으로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본격화됨에 따라 러시아 현지와의 금융거래가 막히고 생산을 위한 부품 조달이 어려워짐에 따라 사실상 더 이상 신차 판매 사업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러우전쟁 발발 당시 현대차그룹의 러시아 전면 철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었다.
그리고 러우전쟁 1년이 지난 지금 현대차그룹은 철수가 아닌 버티기를 결정했다.
인력 80% 감축은 사실상 사업 활동을 포기하되, 건물과 토지 관리만 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으로서는 러우전쟁 이후를 생각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철수는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대차그룹은 러시아에서 끝까지 버텨내고 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사업을 재시작할 때 러시아 자동차 업계의 팔도 도시락이 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 식품기업 팔도는 1998년 러시아 재정난 당시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지급유예)을 선언했고, 불확실한 러시아의 사업환경으로 수많은 외국 기업이 러시아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팔도는 러시아 잔류를 선택했고, 현재 팔도는 러시아 라면시장의 60%를 점유하는 큰 성공을 거뒀다. 게다가 최근에 팔도는 러우전쟁에도 불구하고 `22.10월 스페인 기업 GB푸드의 러시아 사업부문을 인수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 자동차 시장 점유율 2위, 3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현대차그룹의 빈자리는 누가 차지했을까? 바로 중국이다.
현대차그룹을 비롯한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이 러시아 제재로 인하여 사업을 중단하거나 철수할 때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중국은 적극적으로 러시아 자동차 시장을 공략했다.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러시아 자동차 시장을 저렴한 가격을 기반으로 빠르게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글로벌 자동차 기업의 러시아 시설을 인수하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전쟁 전 러시아에는 총 60개의 완성차 브랜드가 진출했었지만, 현재는 14개 브랜드만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 중 3개는 러시아 브랜드, 나머지 11개는 중국 브랜드다.(`22.12월 머니투데이)
** 일본의 닛산은 러시아 내 생산 및 연구시설을 러시아 국영기업에 넘겼으며, 닛산의 시설들은 러시아 자동차 기업과 중국 자동차 기업의 합작으로 재가동될 것으로 예상된다.(`22.11월 KBS NEWS)
이쯤에서 다시 위의 그래프를 확인해보면 대기업의 자동차 사업이 큰 타격을 입고 있을 때 중소기업이 주로 취급하는 중고차는 러우전쟁 이후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2021년 0.2억 달러에서 2022년 5억 달러를 수출하며 2,550% 성장을 이뤄냈다. 러시아에서 현기차에 대한 수요가 여전하지만, 제재로 인하여 신차 판매 및 생산이 어려워지자 신차 수요가 중고차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에서 불티나게 팔린다 한국 중고차 수출 732% 폭증 왜]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39907#home
위와 같은 러시아 중고차 수출 호조의 영향으로 러우전쟁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의 수출이 크게 하락할 때 중소기업의 수출이 선방할 수 있었다.
2. 수송장비(선박, 수송장비 부품) 수출
앞서 나온 그래프를 다시 확인해보면 신차 수출의 감소와 함께 수송장비 수출 중 수송장비 부품 수출의 큰 감소에 눈에 들어온다. 한국 기업들의 러시아 현지 생산공장이 가동을 멈추고 수송장비 부품은 군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하기에 제재 대상에 포함되어 수출이 크게 급감한 것으로 보인다.
부가적으로 수송장비 품목들 중 선박은 유일하게 감소하지 않은 부분이 흥미롭다. 관련 내용을 찾아보니 어업을 마친 러시아 어선들이 주로 부산에서 선박 수리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러우전쟁 이후에도 러시아 어선들이 여전히 부산에서 선박 수리를 하고 있으며, 이러한 어선 수리는 중소형 조선기업이 주로 하기에 러시아 어선 수리가 중소기업의 러시아 수출 선방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 부산에서 한 해 수리하는 해외 선박은 천여 척이며, 약 80%가 러시아 어선이다.
[러-우크라전쟁 불구 러시아 수리 선박 입항 여전]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479327
3. 의료용품 그리고 엽연초와 담배
의료위생용품은 러우전쟁 이후 수출금액이 크게 증가한 품목 중 하나다. 의료위생용품의 수출은 러우전쟁 이전부터 꾸준한 상승세였으나, 2022년 153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며 2021년 대비 29% 증가한 급격한 수출실적 증가를 달성했다. 2022년의 급격한 수출 증가는 전쟁으로 인한 의료위생용품 수요 급증에 기인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담배와 엽연초는 품목 간 희비가 엇갈렸다. 2020년 담배의 수출실적은 376억 달러를 달성하며 전년(27억 달러) 대비 1,259% 상승하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2021년 급격하게 수출이 하락한 뒤 2022년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반면에 엽연초(가공하지 않고 말린 담뱃잎)의 수출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2022년에는 수출실적 158억 달러를 기록하며 전년(97억 달러) 대비 63% 수출이 상승하는 눈에 띄는 성장을 이뤄냈다.
(여기서부터 뇌피셜 주의) 아마도 코로나로 인해 러시아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해외 담배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것 같다. 그리고 이내 그 맛에 크게 실망하면서 2022년까지 담배 수출이 지속적으로 하락한듯 싶다. 또한 이런 담배를 소비할 바에 원재료(엽연초)를 수입해서 내 입맛에 맞는 거로 만들겠다는 러시아인들의 의자가 엽연초 수출 증가로 반영된 것 같다.
4. 에너지(석탄)
지금까지는 계속 러시아와 관련된 세부 품목의 수출만 확인해봤다. 여기서 분위기 전환용으로 잠시 시야를 넓혀서 품목 단위가 아닌, 러시아와의 전반적인 무역수지를 확인해보자.
예전부터 러시아는 한국의 대표적인 무역수지 적자 국가였다. 코로나때 감소했던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2021년 예년과 유사한 수준의 73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2022년 러시아와의 무역과 관련된 제재로 인하여 수출입이 감소하였으나, 수출이 더 큰 폭으로 감소하여 전 년보다 더 높은 85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이 같은 무역수지 적자 악화 원인은 예상대로 에너지다. 그리고 예상외로 에너지 중 석유가 아닌, 석탄이 주된 무역수지 적자의 원인이다. 아래의 그래프를 보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예전부터 한국은 러시아로부터 주로 석탄을 수입하고 있었다. 2021년까지 감소하던 석탄 수입 규모는 2022년 26백만 톤을 기록하며 전년(22백만 톤) 대비 수입량이 21% 증가했다. 그러나 수입금액의 경우 2022년 57억 달러를 기록하며 전년(26억 달러) 대비 122% 증가하였다. 수입량은 21% 증가했는데 수입금액은 122% 증가한 것이다.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에너지(원유, 석탄, 가스)의 수입단가 추세를 비교해보면 석탄이 다른 에너지 중 가격 상승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석탄 가격이 유난히 비싼 것이 아니라 실제로 2022년에 엄청난 석탄 가격의 상승이 있었다. 2022년 초 단위당 150달러였던 가격은 2022년 중 450달러까지 치솟아 연초 대비 200% 상승했다. 비슷한 시기 유가는 연초 대비 최고 상승률이 70%였던 것에 비하면 석탄의 상승률이 엄청났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다.
비록 석탄의 가격이 말도 안 되게 치솟아도 한국이 석탄의 수입을 멈출 수 없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한국의 발전 연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석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전기업들은 공기업이기에 석탄 수입가격 상승은 고스란히 한국 전체의 손실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모든 석탄 수입국가들이 한국처럼 석탄 가격 상승으로 큰 손해를 보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러시아 제재에 참여하지 않은 중국은 러시아 수출뿐만 아니라, 러시아 수입에서도 실리를 챙기고 있었다. 러시아의 에너지 판매처가 줄어듦에 따라 러시아는 제재에 참여하지 않는 국가들에게 싼 값으로 에너지를 판매했고, 중국은 저렴한 가격으로 에너지를 수입함으로써 인플레이션 부담도 완화할 수 있었다.
[중국, 팔 곳 없는 러시아산 에너지 싸게 수입해 '횡재']
https://imnews.imbc.com/news/2022/world/article/6407699_35680.html
지금까지의 러우전쟁 1년 결과를 살펴보면 러우전쟁의 승자는 에너지 수출로 큰 이득을 봤으나,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끊임없이 지원해주고 있는 미국이 아닌, 조용히 러시아 시장을 잠식하면서 러시아로부터 저렴하게 에너지를 수입하고 있는 중국이 승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 줄 요약
한국 대기업의 러시아 수출과 사업은 큰 피해를 입었다.
중소기업이 주로 취급하는 품목은 러우전쟁의 피해가 미미했거나 오히려 흥했다.
한국은 석탄으로 발전하는데 석탄 가격 미쳤었다.
중국은 러우전쟁으로 큰 이득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