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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나를 만들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가이드가 되었다

by Horang unnii

가이드의 길, 예상치 못한 여행이 되다









어쩌면, 나는 애초에 떠나도록 만들어진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길 위에 선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길이 나를 불렀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길 위의 사람인 것처럼 살아갈지도 모르지만, 여행은 내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그렇게 믿었다.




과거의 나는 해외에서 살아가거나 여행을 직업으로 삼는 삶을 꿈꿔본 적이 없었다. 여행이란 그저 한 번 떠나는 경험일 뿐, 그것이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가이드를 할 때 나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가이드님은 여행 가이드가 천직인 것 같아요.”

“너무 잘 어울려요.”

“멋있어요.”

“카리스마 있어요.”



어디선가 나를 소개할 때

"가이드입니다."


내가 이렇게 소개하면,

던지는 말로 사람들은 어김없이 물었다.


“어쩌다 가이드를 하게 되었어요?”

"여행을 좋아해서 가이드를 하게 된 거예요?"


전혀 아니다. 여행을 좋아해서 가이드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나도 내가 가이드를 이렇게까지

잘 해낼 줄 몰랐고, 즐기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오히려 처음에는 이 직업에 대한 애정도, 로망도 없었다. 그저 누군가의 권유로, 어쩌다 보니 발을 들이게 된 일이었다. 잘 맞는 옷을 갖춘 것 마냥 모양새를 갖추기까지 나에게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깨달았다.

가이드란, 단순한 여행 안내자가 아니라,

여행지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가고 감동을 전하는 서사를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는 가이드를 하면서 인생을 배웠다.










처음부터 여행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 서른을 훌쩍 넘어버린 나였지만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네일 기술을 배우기 위해 2년 동안 어학 과정을 거친 뒤, 2년간 기술을 익히겠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다. 비자까지 모든 준비는 마친 상태였다. 일본의 네일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말에 확신이 있었고, 미용 기술은 여자에게 큰 자산이 될 것이라 믿었다.


알 수 없었다. 출국을 한 달 앞두고 여동생과 떠난 태국 여행이 모든 걸 뒤흔들어버릴 줄은 알지 못했다.


그곳 태국에 '큰 집 오라버니처럼 따뜻함과 충고를 아낌없이 해주는 분'이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일본 유학? 꼭 가야겠어? 네 나이에 4년이면 너무 아깝지 않아? 여기 와서 돈 벌어봐. 오빠가 너 믿고 일할 기회를 줄게."


그의 말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내게 여행 가이드를 해보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길을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이드에 대한 선입견







해외에서 만난 가이드들 중에는 도박에 빠진 사람, 마약에 중독된 사람, 교민을 상대로 속이는 사람도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가이드란 한국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떠밀려서 하는 일'이라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 유학의 길은 고되고 불확실했다. 언어도 준비되지 않았고, 학업과 일을 병행해야 할 외로운 나날이 예상되었다. 반면, 태국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오라버니의 제안은 현실적이었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일본 유학을 접고, 가이드의 길을 선택하기로.

이번에는 너무 쉽게 설득되었다.

아니, 사실은 내가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낯선 세계에서 맞닥뜨린 현실







가이드 생활의 첫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태국에 도착한 후 첫 한 달 동안은 사무실에서

벽만 보고 공부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매일 아침 9시에 출근, 저녁 5시 퇴근.

책상 앞에 앉아 역사와 관광지를 공부해야 했다.


한 달 내내 벽을 보며 지겹도록 같은 내용을 외우던 내 모습을 본 선배들은


"한국에서 너 그렇게 공부 열심히 했니?"

"그렇게 사시 공부했으면 공무원이 됐을 거야"

라며 농담을 던지곤 했다.


출근길도 쉽지 않았다.

태국어도 모르고, 영어도 부족한 상태에서 매일 지상철을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방향은 맞는지, 내리는 역은 정확한지. 사무실까지 가는 길이 틀리진 않았는지. 첫날의 긴장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진 않았을까 두근거리며 손에 땀이 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현지인처럼 모터싸이를 타고 방콕 시내를 누빌 수 있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한국에서 끌고 온 내 캐리어 속엔 화려함의 극치인 반짝이는 스팽글 원피스, 찢어진 청바지, 짧은 치마와 깊게 파인 브이넥 셔츠뿐이었다.

'여자는 머리는 길고, 치마는 짧고, 하이힐은 높아야 한다.' 이것이 내 나름의 '스타일'이었지만,

패션 하나까지도 내 맘대로 할 수 없었고,

가이드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는 규칙과 규율이 강했다.


"빨간 립스틱은 바르지 마."

"머리는 풀지 말고 단정하게 묶어."

"손톱 네일은 지우고, 옷은 얌전하게 입어."


여자 부장의 잔소리는 끊이질 않았고, 남자 소장은 이유도 없이 나를 불러 세우고 화를 냈다.

다음 글에 이 여자부장과 남자 소장의 대한 글도 에피소드로 엮어 써볼 요량인데 할 말이 아주 무궁무진하다. 그들에게 핍박 아닌 핍박을 받고, 억울하고 분해서 화장실에서 한 시간을 넘게 울었던 날도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온 건가?"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튀는 행색과 여자 막내 가이드. 한국에서 막 들어온 따끈따끈한 신입. 전체 가이드 인원 중에 여자가이드는 채 10명이 되지 않았다. 남자 60명을 단속하는 것보다 여자 신입 1명을 단속하는 게 더 쉬었을리라. 가이드만 70명이 넘는 회사에서 군대보다 더한 규율은 필요이상으로 단단해야 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의 질책과 잔소리는 나를 '가이드답게' 만들기 위한 훈련이었다.








독수리 오 형제, 새로운 인연이 생기다






가이드 일을 배우는 것이 익숙해지지 않아 어깨가 축 처지고 힘이 빠질 무렵,

나를 유독 챙겨주는 네 명의 남자 선배가 생겼다.


매일 사무실에서 벽만 보고 공부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점심때 불러 고기를 사주곤 했다. 그들과 날마다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우리는 남자 넷, 여자 하나

완전체로 '독수리 오 형제'가 되었다.


공항 미팅도 같이 가고, 투어가 끝난 뒤엔 맥주 한잔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때때로 술에 취한 선배들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며 막내 노릇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 덕분에 태국 생활이 훨씬 즐거워졌다.









포커페이스를 배우다, 그리고 성장하다







어느 날, 큰집 오라버니 보다 더 큰집 오라버니 같은 분이 내게 말했다.


"네가 딱 한 가지만 잘하면 돼. 포커페이스를 익혀라."


처음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아주 잘 아는 오라버니의 성공 키 포인트 말이었다. 나는 내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이었고, 콧대 높은 성격도 그대로였다. 오만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투어현장에서 겪을 수많은 일들을 대처하기 위해 첫 번째로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현장을 누비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면서 조금씩 배우며 성장하고 변해갔다.


나는 분명 화가 치솟을 만큼 화가 나 있었지만, 투어 내내 웃고 떠들며 여행을 이끌었고 어떤 날은 울고 싶었지만,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연극무대 위에 배우들도 이런 마음으로 무대에 서야 했을까?"


가이드란 직업을 가지는 동안, 정말 별의별 에피소드를 다 겪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까이마이'(초보 가이드)라는 딱지를 떼고, 차장이 되고, 부장이 되었다. 이제는 신입 가이드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서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였을까?'


이제는 알 것 같다.


가이드는 단순한 여행 안내자가 아니다.

여행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그 순간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가이드로서 나만의 방패와 칼을 다듬어야 했고, 성숙함과 유연한 태도를 갖춰야 했다. 나를 위한 가이드가 아니라, 여행자들을 위한 '가이드'의 모습을 만들어가야 했다.










초보 가이드 시절, 잊을 수 없는 '완벽한 가족'







투어를 진행하면서 손에 꼽을 만큼 특별한 손님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가족이 있다.


엄마, 아빠, 성인 아들, 성인 딸. 단 네 명 만을 위한 투어였다. 그들과 함께한 3박 5일은 지금도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생생하게 다가온 적이 있었을까.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언어가 고급스러웠고, 여유로웠고, 온화했다. 모든 작은 행동에서도 배려와 존중이 묻어났고, 대화에는 사랑이 넘쳤다. 그 모든 것들을 내 것으로 삼아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생각 끝에는


"나도 이들과 가족이 되고 싶다."

“ 이 가족에게 날 입양 보내고 싶다.”

머릿속으로 나도 가족 삼아 주세요.라고 수없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들의 가족이 될 수 있나요?

그보다 더 깊은 감정도 찾아왔다. 미혼모 싱글맘인 나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딸의 양육을 맡겨두고 해외에서 혼자 가이드 일을 할 때였기에

"우리 딸을 이 가족에게 입양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까지 해보게 되었다. 나만 입양해 달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일평생, 딸을 내 손이 아닌 타인의 손에 맡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 가족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입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았다. 아이를 보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이 가족과 함께 가족이 되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마음이었다. 나와 내 아이, 둘 다를 이들에게 입양 보내고 싶었다. 내가 그들의 가족이 되고 싶었고, 우리 딸도 그들과 함께라면 더 따뜻한 사랑 속에서 자랄 것 같았다.


그들은 너무나 따뜻했다.

나는 눈 내리는 창밖의 성냥팔이 소녀 같았고, 그들은 따뜻한 난로가에 앉아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단란한 가족 같았다. 사랑이 넘쳐서 그 따뜻함이 난로에서 피어나는 따뜻함을 이기는 그런

가족이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는 아이 같았고, 그 온기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 동안,

나는 가이드란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가이드는 원래 손님과 함께 식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과는 모든 식사를 함께 했고,

일정도 상의하며 함께 만들어 갔다.

초보 가이드라 부족한 점도 많았을 텐데, 그들은 차분하고 관대했다. 우리는 진짜 가족처럼 여행했다.


뜻깊은 인연만 남은 것은 아니었다.

그 가족 아빠의 직업은 ‘파일럿’이었는데

투어 내내 그들은 옵션과 쇼핑에서도 아낌없이 소비했고, 덕분에 초보 가이드 치고는 꽤 큰 커미션을 받을 수 있었다. 20명을 모신 선배보다도 더 많은 수익을 올렸고, 얼마나 수익을 올렸는지 우스갯소리로 그로 인해 이상한 루머까지 따라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게 그 가족과 보낸 시간은 돈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남았다. 이 일을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가이드, 인생의 공부를 위한 최고의 직업







이 길을 걸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포커페이스를 익히고, 즉흥적으로 상황을 해결하는 법을 익히고, 사람의 감정을 읽는 능력이 길러졌다.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결국 이 경험이 내 삶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이드는 단순한 안내자가 아니다. 여행을 통해 감동을 만들고,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쌓아가는 일이다. 낯선 길에서 길을 찾듯, 이 일을 하면서 나 역시 나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빛나는 사람이 되어갔다.








누군가는 가이드를 '마약 같은 꽃'이라고 한다.

힘든 일이지만,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직업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 그들의 감동, 여행이 끝나고도 이어지는 인연.

그 모든 것이 나를 중독처럼 사로잡았다.


같은 장소라도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맛이 달라지고, 같은 풍경도 새로운 의미가 된다.








어쩌다 시작된 가이드의 길.







그 길은 나에게 무수한 이야기와 깨달음을 남겨주었다.







이제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이드는 인생에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면 꼭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직업이야. 그 길이 최소한 사계절 두 번은 지나는 경험이 되길 바라. 그곳에서 분명 더 단단하고 빛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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