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설늙은이] 회고하는 마지막과 또 다른 시작
숨이 턱턱 차오르다 못해 터져버리고 나니 그다음은 오히려 쉬워졌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가 명쾌하게 보였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오히려 나의 탓을 구하던 그날이 지난 다음 날의 나는, 평소와 똑같이 정시 출근을 했다. 어제 그렇게 답답한 일들이 닥쳤고 내 잘못이라고 말하기엔 억지가 덕지덕지 붙은 말을 들었대도 내게는 내 일이 있었다. 그날의 일은 그날에 끝내야 하므로 어제의 감정을 다음 날의 기분으로 끌고 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마음도, 생각도 없었다.
"쌤, 나는 쌤 오늘 안 나오는 줄 알았잖아."
어제의 한바탕이 부서에서도 꽤 큰 이슈였고 또 나라는 개인에게도 큰 상처가 되었음을 알았던 분이 내게 건넨 말이었다. 그 말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었지만 내 특유의 궁금증이 왜라는 질문을 할 뻔했다가 이내 흩어졌고 그저 웃음으로 답을 건넸다. 모든 것이 명쾌해져 버렸다. 무작정 일의 능률을 따져대며 일한 것이 아니라 알맞은 일의 과정이 흘러가길 원했으므로 떼를 써가며 일을 건넬 때에도 그저 흘러가길 바라며 해내는 것도 해봤고 내 나름의 인내와 성실을 쏟아부어도 봤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해봤다.
나의 애씀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기만 한 변화와 자신들의 평화로움을 깨트리는 것으로 비쳐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그랬고 환경이 그랬다. 모두가 변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곳만 변화를 비껴갈 수 있겠는가. 뜻밖에 상황을 마주하고 모든 예상을 비껴간 건 내 생각이었다. 오랜 시간 고고히 쌓인 환경이란 한 개인이 어찌하기엔 버거운 일이었다. 내가 건드린 건 그런 것들이었다. 이것이 안정적인 곳의 진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그래도 같은 말을 겉포장지처럼 싸서 보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고 진짜 민낯을 보니 깔끔히 잘라낼 수 있었다. 사회에서 추구하는 인간상,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만 하고 형태는 없는 무수히 짓누르는 말들로부터 안녕을 말할 수 있었다.
회사를 다닌 이후 생긴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버스를 타기 전에 한번, 지하철에서 적게는 세 번 많게는 네다섯 번까지 화장실을 가고 부서에 들어서기 전에 또 한 번 화장실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그 와중에 생긴 이석증으로 훅 꺼져 들어가는 어지러움증으로 고단했던 나에게, 그 지난한 기간 동안 붙잡고 맞추려 애쓴 무형의 의무로부터 해방시켜 숨 터놓고 맘껏 쉴 수 있도록 해줄 때가 온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런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다 시도해 보고 그 누구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을 정도로 그 이유가 타당한 위치를 마주할 때까지 걸어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모든 것이 명쾌해진 것이었다. 미래를 위하여, 이곳에 정규직이 되기 위하여 대학원을 가라거나 이것이 블루오션이라거나 하는 등 그곳에서 듣는 미래를 위한 조언이라는 것은 더 이상 내게는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우습게도 가끔 만약을 생각한다. 만약 내가 일하던 시기가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다녔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하나씩 되짚어보지만 만약이 붙는 답변은 늘 하나로 통한다. 미래의 내 모습이 그 모습을 하고 있다면 나는 나에게 실망을 아주 많이 할 것 같다. 이후의 삶에 남을 깎아내려 지금 내가 가진 모습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그런 못난 인간이 될 것 같았다. 있어 보이는 식의 연기를 나도 모르는 새에 몸에 익힌다면 그것만큼 최악은 없을 것이었고 그 무엇보다도 내 몸과 정신이 견뎌내지 못하고 있었기에 탈출하는 것이 가장 알맞은 정답이었다.
몇 달 후 계약기간까지 일을 하고 퇴사할 것이라는 것을 알리고 나니 소문이 퍼져 이곳저곳에서 연락을 받았고 같이 밥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니 천천히 디데이가 다가왔다. 나도 이것이 내 첫 퇴사이기에 언제 짐을 싸서 나가야 하는 것이 맞는지 몰라 어영부영 지내고 있으니 함께 일하신 선생님 한 분께서 한마디를 던져주셨다.
"쌤, 이제 짐 싸야지!"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부서에서는 내가 퇴사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혹시 모르잖아. 쟤가 그새 마음이 달라졌을 수도 있잖아. 좀 기다려보자."
그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지만 그것도 거기까지였다. 나는 짐을 한가득 싸들고 집으로 향했고 드디어 쉴 수 있었다. 물론, 한 달 정도는 오는 연락에 답을 하느라 온전히 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그러다 얼마 안 된 어느 날엔가 화장실을 갔는데 혈뇨를 보게 되었다. 노란색이어야 할 색이 붉은빛을 띠고 있었고 당혹감에 한동안 멍하게 변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혹시 생리였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건 그것과는 완전 달랐던 것과 혹여나 하고 찾아본 예정일은 너무 멀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는데 왜 또다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찔함이라는 단어는 이날에서야 아주 강하게 와닿는 단어가 되었다. 만약 내가 그곳을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예 그곳에서 쓰러졌었겠다는 생각과 과연 그다음의 내가 있을 수 있었겠냐는 생각에 이것저것을 대입해 보며 검색을 하고 있는데 내게 말을 건네는 엄마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혼란한 마음을 누른 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방금 벌어진 것을 이야기했더니 엄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그랗고 각진 면 하나 없던 얼굴이 한껏 굳어진 형태는 꽤 낯선 것이었다. 방금까지 쾌활했던 얼굴에 짙은 어둠이 지어졌던 그 얼굴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 얼굴빛을 통해 이것이 또 보통일이 아님을 깨달았고 그렇게 나는 또다시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책에는 일정한 구조가 있어서 어느 시점에 다다랐다가 괜찮아지던데 나라는 책은 쉽게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을 내어주지 않았다.
오디오북 녹음&편집: Pabe
배경음악: Youtube Music, The Gentlemen-Divk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