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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눈

눈으로 세상을 보다

by 에이브 Ave


눈은 참 신기하다. 새하얀 눈 밭에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이 본래 티끌보다 더 작았을 텐데 어찌 저렇게 눈덩이가 되었는지 참 신기하다. 하얀 눈이 원래도 저리 눈부시게 빛나던가? 작디작은 눈 결정체를 처음 내 눈에 담았을 때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잘것없는 눈이 그만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담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해서였을까 아님 단순하게만 보였던 눈이 세세하게 조각되어 있어서였을까.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제각각의 눈 결정체는 모이고 또 모여 하나의 눈덩이를 만들어낸다. 하찮은 하나의 눈송이가 모이고 또 모여 온 세상을 뒤엎는다. 그리고 그렇게 새하얀 눈을 담아내고 있는 내 눈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눈의 빛을 감히 품고 있다.


나뭇가지 위에 아슬아슬 앉아있는 눈들이 바람에 휘날린다. 땅에 떨어져 흙먼지를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나뭇가지를 껴안는다. 앙상하게 뻗은 힘없는 나뭇가지는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며 눈송이를 흩뿌리지만 단단히 땅 속에 뿌리내린 늠름한 나무 몸통은 끝까지 눈송이 곁을 지킨다. 이윽고 다시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던 작은 눈송이가 나뭇가지에, 자동차 위에, 아파트 발코니에 안착할 때까지 바람은 눈송이를 떠민다. 더 멀리 여행할 수 있도록, 더 용기 내어 꿈을 꿀 수 있도록 바람은 눈송이를 떠민다. 시간이 지나 햇볕이 들면 곧 녹아 사라질 눈송이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순간 눈송이는 잠시나마 한 겨울의 꿈을 꾼다.


눈은 참 어여쁘다. 소망하던 그 순간을 위해 궂은 바람에도 따가운 소금에도 질척거리는 운동화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니. 나뭇가지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눈송이가 이내 땅에 곤두박질쳐질 때 야속한 나뭇가지와 바람만을 꾸짖는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나뒹굴다 곧 얼룩덜룩 흘먼지를 뒤집어쓰는 눈송이는 속상함에 눈물만 떨군다. 아이들 발자국 소리에 신이 나 기다리던 눈송이는 이내 추위에 옷을 여미고 뒤돌아서는 아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쌩쌩 불어오는 칼바람이 잦아들고 햇빛이 비추어도 아이들은 녹아 흘러내리는 눈송이를 지나쳐간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눈송이가 되기를, 물줄기를 타고 흘러가는 눈송이, 아니 물방울은 또 꿈을 꾼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였던가.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이 사람은 눈에 어떤 걸 담았는지 어떤 걸 담고 있는지 그 사람의 생각이 보인다. 새하얀 눈을 가득 담았던 눈은 비록 까만 눈동자만이 선명하게 남아있지만, 밝은 빛을 한 아름 담았던 눈은 비록 빛을 잃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눈은 그 사람을 보여준다. 정처 없이 그 사람의 뒤를 쫓던 눈동자는 이제 그 흔적만 보아도 한없이 흔들리고 무거운 눈꺼풀에 감기고만 눈동자는 이제 안식을 취한다. 눈처럼 정직한 것은 없을 것이다. 눈은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말한다. 추억을 담고 안식을 알고 사랑을 말한다. 이것을 눈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눈은 내 인생의 등불이요 소금이다. 그러나 눈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담기에도 부족한데 애꿎은 것만 눈에 담는다. 내 인생의 등불이지만 내 인생의 안대이기도 하며 내 인생의 소금이지만 내 인생의 설탕이기도 하다. 필요한 곳에 쓰여야 하지만 원하는 곳에 쓰이기도 하는 눈은 제멋대로다. 그렇다면 내 눈은 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을까? 내가 눈에 무엇을 담았는지 무엇을 담고자 하는지 다 알 수 있을까? 눈은 야속하다. 내가 보이기 원하는 것뿐 아니라 보이기 싫어하는 것까지 다 보여야하니까.


새하얀 눈을 담고 있는 내 눈도 저렇게 하얄까? 보석처럼 반짝이는 저 눈처럼 나의 눈도 반짝이고 있을까? 하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은 눈은 본래 하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 색이 없는 물과도 같은 무색의 눈송이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거라면 나도 어쩌면 내 눈 자체로 내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보고 담는지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내가 보고 담는 것이 결국 내 마음에 간직하게 되니까 그래서 내 눈은 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붉은색 빛을 받으면 불그스름해지는 눈송이처럼 악한 것을 눈에 담으면 나의 마음도 악을 품게 된다. 반대로 환한 빛을 받으면 하얗게 빛나는 눈송이처럼 선한 것을 눈에 담으면 나의 마음도 선을 간직하게 된다.


눈은 내 마음의 창이며 거울이다. 내가 보는 것을 담고 내가 품는 것을 보인다. 눈은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고 내가 담고자 하는 것을 담는다. 추억을 담고 안식을 알고 사랑을 말한다. 소망하고 꿈을 꾸고 꿈을 이룬다.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답다.


눈을 안다
눈으로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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