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모음집 03
한창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한방병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같이 치료를 받던 아빠에게 잠깐 카페에 들렀다가 집에 가겠다는 거짓말을 한 뒤 혼자 정신과로 향했었다. 참 씁쓸했다. 아빠를 속이고 몰래 가야하는 병원이라니. 그 땐 하나 뿐인 딸이 정신과 간다는 말을 선뜻 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그랬다. 아빠가 많이 속상해 할 것 같았다.
'XX동 정신과'를 검색한 후 여자 선생님이 있는 곳을 찾았다. 한참을 걸어가 도착한 병원에서 '초진은 평일에만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당시 회사원이었던 내게 평일 진료는 어려워 다른 곳을 가기로 했다. 그렇게 내가 다녔던 정신과를 만나게 된다.
초진 전 간단한 설문지를 작성하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설문지를 읽고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냐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펑펑 울며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쉼 없이 달려온 지난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꼈던 매일의 불안감과 우울함,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막연히 자주 들었던 자살 생각 등. 선생님은 참으로 차분했다.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내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며, 마치 내 증상은 놀랍지 않은 것 같았다. 큰 반응 없는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이야기를 하는 내 자신이 처음엔 조금 창피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 곳에서의 나는 전혀 이상하거나 특이할 게 없구나 싶은 생각이 내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대략 20분 간의 진료 끝에 7일치 약을 처방 받았다. 정확히 내 증상을 무어라 부르는 것인지, 내 상태가 어떤건지 명확한 결론을 내려주길 바랐는데 그러진 않았다. 첫 정신과 진료, 첫 정신과 약. 묵혀둔 내 우울과 불안을 꺼내보이기. 낯설지만 그리고 빠른 호전을 기대하진 않지만 내 작은 용기가 내게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되길 바랐다. 밖엔 그 겨울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