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ew moon Sep 06. 2022

첫번째 도망

조각 모음집 03


한창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한방병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같이 치료를 받던 아빠에게 잠깐 카페에 들렀다가 집에 가겠다는 거짓말을 한 뒤 혼자 정신과로 향했었다. 참 씁쓸했다. 아빠를 속이고 몰래 가야하는 병원이라니. 그 땐 하나 뿐인 딸이 정신과 간다는 말을 선뜻 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그랬다. 아빠가 많이 속상해 할 것 같았다.


'XX동 정신과'를 검색한 후 여자 선생님이 있는 곳을 찾았다. 한참을 걸어가 도착한 병원에서 '초진은 평일에만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당시 회사원이었던 내게 평일 진료는 어려워 다른 곳을 가기로 했다. 그렇게 내가 다녔던 정신과를 만나게 된다.


초진 전 간단한 설문지를 작성하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설문지를 읽고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냐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펑펑 울며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쉼 없이 달려온 지난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꼈던 매일의 불안감과 우울함,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막연히 자주 들었던 자살 생각 등. 선생님은 참으로 차분했다.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내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며, 마치 내 증상은 놀랍지 않은 것 같았다. 큰 반응 없는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이야기를 하는 내 자신이 처음엔 조금 창피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 곳에서의 나는 전혀 이상하거나 특이할 게 없구나 싶은 생각이 내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대략 20분 간의 진료 끝에 7일치 약을 처방 받았다. 정확히 내 증상을 무어라 부르는 것인지, 내 상태가 어떤건지 명확한 결론을 내려주길 바랐는데 그러진 않았다. 첫 정신과 진료, 첫 정신과 약. 묵혀둔 내 우울과 불안을 꺼내보이기. 낯설지만 그리고 빠른 호전을 기대하진 않지만 내 작은 용기가 내게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되길 바랐다. 밖엔 그 겨울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전 03화 난 내가 불쌍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