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정의될 필요는 없다.
어느 작가의 에세이를 보았다. 그가 가진 문학에 대한 사랑과 진솔함, 삶의 태도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어쩌면 조금은 공격적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한, 그의 문학에 대한 사랑에서 강렬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러한 감상을 출판 업계에 있는 친구에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작가에 대한 좋지 않은 추문이었다. 작품은 유명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싸늘하다는 이야기였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급을 나누고, 말단인 사람들에게는 명함조차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좋았던 감상이 사라졌다.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런 감상을 가졌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지고, 작가에게 배신감마저 들었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이 큰 만큼, 실망할 때 느끼는 심적 대미지도 컸다.
친구가 원망스러웠다. 듣지 않았으면 좋은 감정으로 잘 매듭지어 정리됐을 기억이 변질된 것 같았다. 실제로 작가가 어떤 사람이건 간에, 내가 모르고 살아간다면, 나에게는 그저 긍정적인 요소가 하나가 더 생기는 것뿐일 텐데. 구태여 그 요소에 검은 칠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속상함이 들던 중에 문득, 작가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상황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조금 다를 수 있는 상황은 언제나 있기 마련인데, 친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작가의 입장을 떠올리며 변호할 틈도 없이 '사람 잘못 봤네. 그렇게 안 봤는데.'라며 실망부터 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고나니 이런 상황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상황을 이용해서 중립적인 생각을 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로서는 당장에 작가의 입장은 들어 볼 수 없으니 공백으로 비워두고, 친구에게 들은 추문은 딱 절반만큼의 자리만 내어준 다음, 그 이상으로 생각이 자라지 않도록 막는 연습을 마음속에서 해보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작가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듣거나, 직접 만날 일이 있을 때 나머지 공백을 채워서 어떤 생각과 말이 옳았는지 가치 판단을 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 무엇이 어떠한가' 판단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선호하고, 정확하지 않은 것들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 딱 정해진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판단을 유예시켜 보자는 것. 모든 것이 '정의'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중립을 지키는 연습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