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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자란 나, 덩더쿵에서 피어난 시간들

챕터 토마토

by 메론

덩더쿵과의 인연이 시작된 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간다. 외동인 데다 기질적으로 내향적인 아이라 친구 사귀기도, 자기표현도 어려웠는데 15살이 된 지금은 덩더쿵을 함께 다녔던 친구들, 초등학교 친구들, 중학교 친구들이 각각 따로 무리가 있을 정도로 꼭 필요한 인간관계는 잘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낳고 정신없이 키우다가 어느덧 가정을 벗어나 보육기관에 가야 하는 시점에 고민이 많았다. 불안이 높은 엄마였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나오는 보육기관의 아동학대 소식은 불안을 더 증폭시키고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의 발달단계에 맞게 더 넓은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는 시기가 왔고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예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보던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어 그 당시 살던 동네에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있는지 알아봤지만 차로 40분 이상 걸리는 곳뿐이라 주저하던 중 이런 고민을 동네 커뮤니티 카페에 올렸고 몇몇 또래 엄마들의 연락이 왔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개원하려고 준비 중인데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새롭게 어린이집을 시작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좌충우돌의 과정을 겪다가 진짜 개원을 하게 되면 정말 보람될 것 같았고 혹여 실패한다 해도 나쁜 경험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준비모임이 시작되어 이후로 6개월 정도 회의와 공부를 이어갔다. 준비 기간이 늘어진 탓이었을까? 초기에 으쌰으쌰 하던 멤버들도 하나둘씩 이사, 개인사정을 들어 모임을 그만두었고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4명 정도였다. 이대로 인원을 충원해 이어갈 것인지, 여기에서 멈출 것인지 긴 회의를 가졌고 결국 우리는 포기를 선택했다. 현실적인 벽에 부딪힌 것이다. 하지만 좌절하진 않았다. 이 기간을 통해 아이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는 내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으니까.


당시 거주지 인근에 갈만한 곳이 없다면 이사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당시 남편의 회사와 집과의 거리를 고려해서 우리 부부가 최종 결정한 지역이 분당이었다. 당시에도 일하는 엄마였기에 전일제를 보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 테지만 공동체 생활을 처음 하는 아이에게 전일제는 무리라는 판단에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분당 유일의 반일제 ‘덩더쿵 공동육아 어린이집’이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일반 어린이집과 달리 대기 후에 순번대로 들어가는 시스템이 아니다. 대기를 한 후 혹은 매년 돌아오는 모집 시기에 신청을 하면 자기소개와 같은 몇 장의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여기에서 또 통과가 되면 교사, 기존 조합원 아마들과의 면담이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지원자 가족이 해당 공동체에 함께 하면 좋겠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최종 합격! 합격이라는 말이 실제 공동육아 어린이집 등원 결정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단어이지만 공동체를 표방하는 보육기관이기에 서로를 탐색하고 판단하는 과정은 꼭 필요하다. 우리 부부 역시 이 과정을 거치며 공동육아에 대한 생각도 정리할 수 있었고 보다 명료한 바람을 가지고 공동육아에 합류할 수 있었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공동육아의 시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기존 조합들의 갈등으로 이미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였고 그로 인한 후폭풍이 남아있었다. 덩더쿵 문을 닫을 수는 없으니 신입 조합을 모집한 후 할 일을 다했다며 탈퇴를 하겠다는 가정이 속속 나온 것이다. 이제 갓 공동육아에 들어와 서로 친해지고 끈끈해질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던 나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치 덩더쿵 유지를 위해 이용당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는 이것도 또한 공동육아의 생리이자 한계임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참 기운 빠지는 일이었다. 졸지에 신입이 되자마자 이사가 되었고 공동육아의 달콤함을 맛보기도 전에 일여 치여 지쳐갔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으니 망정이었지 공동육아의 이사 업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지쳐갈 즈음,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아이랑 다 같이 행복하자고 들어왔는데 이렇게 당신이 피폐해지는 게 과연 맞는 걸까?”


그렇게 고민이 시작되었다. 내가 공동육아를 결정한 것은 아이의 행복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나도 육아를 하며 동지를 얻고 기댈 수 있는 존재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도 한 이유였다. ‘나는 과연 이곳에서 동지와 기댈 수 있는 존재를 만들고 있는가?’ 오랜 고민의 답은 ‘그렇다.’였다. 회의를 하며, 안건을 정하며 오해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어쩌면 정말 친해지는 과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형제자매가 죽기 살기로 싸우며 둘도 없는 관계가 되는 것처럼. 그 속에서 나는 정말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늘 꿈꿨던 큰 언니를 얻었고, 친구를 얻었고 동생을 얻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나 역시 덩더쿵 안에서 많은 것을 얻고 있었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러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공동육아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하는 나와는 달리 아이는 마냥 신난 채 덩더쿵 안에서 자기다움을 발견하며 건강하게 잘 자랐다. 친구들이 놀이에 끼워주지 않아 속상할 때도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배웠고 그렇게 단단해진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동생, 친구를 챙겼다. 덩더쿵에서 아이를 키우며 코끝 징해지는 경험이 여러 번이었는데 그중 한 가지 기억이 오래 남아있다.


덩더쿵을 다닐 당시에 발달이 조금 더딘 아이가 있었다. 사회적 기술이 부족하다 보니 친구는 물론 형님들도 그 아이와 짝이 되거나 함께 노는 것을 꺼려했다. 그런데 종종 교육아마를 들어가 보면 나들이 갈 때 유독 내 아이가 그 아이와 짝꿍이 되는 것이 아닌가? 아이도 친구와 손잡고 가고 싶을 텐데 매번 그 동생과 짝이 되는 것 같아 아이에게 슬쩍 물었다. “00아, 엄마가 보니까 나들이 갈 때 A랑 자주 짝꿍 하는 거 같던데 00이는 괜찮아?” 아이가 답했다. “엄마, 나도 속상하지. 나도 B랑 짝하고 싶어. 근데 나 아니면 아무도 A손 안 잡으려고 해. 아이의 답을 들으니 왠지 모를 화가 났다. 귀한 내 아이가 상처를 받는 것은 아닌지, 내 표정을 읽었던 것일까? 아이가 이어서 말을 꺼냈다. “엄마, 나는 A를 도울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해. 내가 A손 잡기 싫다고 하면 A는 정말 속상할 거야.” 아이의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겨우 일곱 살이 나보다 어른 같았다. ‘그래, 너는 이렇게 네 안의 예쁜 마음을 덩더쿵 안에서 성장시키고 있었구나. 그런 00이의 마음을 엄마가 몰랐네. 미안해,’ 이 말을 아이에게 해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이렇게 아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경험을 여러 번 했고 그래서 어쩌면 더 공동육아를 신뢰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더 감사한 것은 아이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자라고 있었다는 점이다. 공동육아를 졸업하며 내가 얻은 것은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고 나 역시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 깨달음은 내가 지금 상담자로 살아가게 해 준 하나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공동육아에서 아이만 잘 키운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신도 자기가 누구인지 조금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공동육아 생활을 한 번 시도해 볼만 하지 않을까?


덩더쿵을 졸업한 후 요즘도 가끔 들춰보는 것이 있다. 아이의 졸업앨범이다. 꼬물꼬물 아가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웃고 있는 모습, 세상 진지하게 고추장을 담그는 모습, 도롱뇽 개울가에서 물놀이하는 모습, 들살이에서 입에 검둥재가 묻을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감자를 먹는 모습까지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음을 이제는 정말 확신한다. 그리고 앨범 맨 앞에 교사들이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적어 준 맞춤형 졸업 축하 문구는 볼 때마다 나의 눈물 버튼이다.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힘을 항상 품고 있는 봄날의 새순 같은 00아!

드넓은 세상에 나가서도 마음속 특별한 선물을 잘 펼치며 살도록 하렴.’


by 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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