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소라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방과 후엔 늘 흙냄새가 묻어나는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이 들어서지 않은 공터의 흙언덕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풀밭에서 데굴데굴 굴러보고,
길가에 핀 들꽃을 엮어 팔찌를 만들어 친구들과 나눠 끼던 기억.
해가 지고 나면 반딧불이가 어스름 속을 조용히 떠다녔다.
그 시절 나는 그저, 그 하루가 좋아서 웃고 놀던 아이였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삶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는 시간은 사라지고, 학교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학원으로 향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던 길,
아무도 없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 조용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잠깐의 시간이 유일한 나만의 쉼표였다.
그렇게 미술이라는 길 위에 10년 가까운 시간을 쏟아부었다.
결국 미대에 진학했고, 졸업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나는 이 길과 맞지 않는다는 걸.
애쓰고 노력해 봤지만, 마음이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했던 이유는
달리 갈 줄 아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패자’라는 낙인이 두려웠고,
무엇보다 부모님에게 실망을 안길까 봐 겁이 났다.
대학 시절은 진로를 고민하거나 스스로를 찾아가는 시간이 되지 못했다.
그동안 못 해본 일들을 뒤늦게 해 보며,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른 채 방황했다.
운 좋게도 졸업 후 원하던 직장에 취직하게 되었고,
뜻밖에도 그 일이 내게 잘 맞았다.
꿈꿔오던 일은 아니었지만
일은 재미있었고, 나와 잘 맞았다.
오랜 시간 그곳에서 일했고,
짧은 시간 안에 리더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 일을 찾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왔기 때문은 아닐까.
직장에선 팀을 이끌고 결정을 내리는 리더였지만,
정작 내 삶을 리드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남편과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 아이만큼은 스스로 삶의 방향을 정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남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렇게 자라고 있는 우리 아이는,
어쩌면 그 바람 그대로의 모습이다.
자기 주관이 분명하고,
좋고 싫음이 확실하고,
자기 뜻을 꺾지 않으려는 힘이 있다.
그런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고집부리는 아이를 다그치며
나도 모르게 아이를 내 기준에 맞추려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감정이 앞서 소리를 지르고,
상처가 될 말을 내뱉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언제나 후회한다.
이게 내가 바라던 모습이었나?
내가 편하자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만들려는 건 아닌가?
아이 안의 다채로운 색을 무심코 회색으로 덧칠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반짝이던 빛을 내가 꺼트리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아이가 자기 삶의 리더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 길에 함께 서서 등을 밝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이를 내 틀에 맞추기보다는,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지금도 매일 연습하고 있다.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지,
그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려면
무엇보다 나부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이를 통해 다시 배우고 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결국 나 자신을 다시 키우는 일이라는 걸 점점 더 느낀다.
아이의 눈을 통해 내 지난 삶을 들여다보고,
잃어버렸던 감정과 욕망을 다시 하나씩 짚어가며
조금씩 더 나다운 사람으로 자라나고 있다.
아직은 서툴다.
아이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도,
내 안에 오랜 시간 쌓인 익숙한 반응들을 내려놓는 일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
어떤 날은 후회가 더 크고,
어떤 날은 그저 버티는 것이 전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제는 나도 내가 선택한 길을 걸으려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정해놓은 선 안에 머무르지 않고,
나와 아이가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길을 스스로 그려가고 싶다는 마음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
아이에게 등을 비춰주려 했던 내가,
오히려 아이의 빛에 비쳐
더 환한 길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들.
그렇게 아이도, 나도
서로를 비추는 작은 빛이 되어 함께 성장해 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다시 한번 연습을 시작한다.
by 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