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리코
하늘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내리쬐는 햇볕 아래
긴 막대를 든 소년이 맨발로 들판을 내달린다.
구불구불한 막대 끝엔
어쩐지 조금은 부담스러운 양파망이 하나 달려있는데,
그렇다. 이건 잠자리채다.
비록 문방구에서 파는 것처럼 곧고 알록달록 예쁘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만들어준 잠자리채의 성능 하나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최고다. 친구들이 잡지 못하는 희귀 잠자리도
소년의 거대한 뜰채는 피할 길이 없었다.
전설의 무기를 가진 소년은 자연스럽게 동네에서 유명해졌다.
친구들과 들판을 내달린 시간만큼 소년은 자랐고
드디어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학교에 가게 되었다.
학교라는 곳은 어쩐지 끊임없이 준비물을 요구했는데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무언가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소년의 손에 딱 맞는 크기에 완벽한 성능까지.
손재주가 남다른 부모님의 물건은 언제나 최고였다.
하물며 전설의 잠자리채로 동네를 평정했던 소년이었기에
부모님의 작품들은 언제나 소년의 자랑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한다.
야속하게도 알록달록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친구들의 준비물과
소년의 물건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방구에서 파는 것들은 분명 성능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단지 남들과 다른 게 싫어서 때로는 감추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투정을 부렸던 것 같기도 하다.
행여라도 흠이 될까 노심초사 다듬고 가꾼 작품들의 가치가
한없이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소년에게 부모는 더 이상 준비물을 만들어 줄 수 없었다.
대신 소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부지런히 사다 주셨다.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걸 소년은 알 길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소년은
그렇게 부모의 세월과 눈물을 먹으며 몸집을 키워나갔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그저 받기만 하며 말이다.
어느덧 소년은 장성했고,
겉으로는 제법 어른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고, 가정을 꾸렸고, 첫아이를 품에 안았다.
안았다기보다는 행여나 놓칠까, 너무 꽉 잡는 것은 아닐까
엉거주춤 그저 팔 위에 얹고 있었다는 것이 맞겠다.
눈도 채 못 뜬 작은 천사는 그게 뭐가 그렇게 편하다고
그저 새근새근 잠만 잘 뿐이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아빠가 되었다는 것도, 이 아이가 나의 일부라는 것도 말이다.
그냥 아빠라니까 아빠인가 보다. 부모라니까 부모인가 보다 싶었다.
끊임없이 울고, 내 잠을 빼앗고, 내 루틴을 깨뜨리며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 집에 나와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작은 누군가가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내 물건을 만지고,
정성껏 정리해 놓은 물건을 잔뜩 어지르며 돌아다닌다.
"넌 누구야? 어디서 왔니?"
짜증이 극에 달한 40개월.
악을 쓰며 우는 아이를 향해 덩달아 소리를 지르고 있다 보면
이게 아이를 훈육하는 건지, 아이에게 화풀이하고 있는 건지
정신이 가물가물해진다.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내 어릴 적 기억에 이런 장면은 없다는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지, 부모님은 나에게 그러지 않았던 것인지...
문득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만 같은 강한 죄책감이 몰려온다.
부모의 흰머리 하나가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 하나다.
이제는 검은 머리가 드문드문 얼마 남지 않은 부모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별거 아니라는 듯 대못을 박는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감히, 나 또한 부모가 된 지금,
이제야 나를 키워낸 부모님을 아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부모님이 직접 준비물을 만들어 주던 것은
결코 넉넉하지 못한 사정 때문이 아니다.
그게 무엇이든,
사소한 것 하나라도 온 정성을 다해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그것은 나에 대한 조건 없는 헌신과 사랑이었다.
이제는 내 삶 그 자체가 돼버린 나의 아이.
내가 아이에게 전설의 무기를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모님만큼이나 잘할 수 있을지 겁도 나지만,
그게 무엇이든 열과 성을 다해볼 생각이다.
소년의 부모가 소년에게 그랬듯이.
이제는 내 모든 것을 아이에게 내어줄 준비가 된 것만 같다.
소년은 그렇게 점차 아빠가 되고 있다.
by 리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