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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비내린 Mar 11. 2020

홀로 네 명의 자식을 키워 온 아버지를 생각하며

LH청년임대주택을 신청하는 중에 떠오른 기억

어제저녁 LH에서 시행하는 청년임대주택을 신청했다. 가족 구성원의 정보를 입력하다 보니 오랜만에 등본을 뗐다. 등본에 기재된 거주지는 수년간 거쳐간 발자취였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초등학교 2학년에 이사를 갔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네 명의 식구는 아버지를 따라 김해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독립했다. 읍에 있기보다 시에서 공부하라는 선생님의 권유에 창원에 있는 학교로 진학했다. 학교까지 거리가 꽤 되다 보니 등교에 어려움이 있어 창원에 집을 구했다. 생활비는 여전히 아버지께 받았지만 장보기, 방청소, 분리수거 등의 집안일은 스스로 했다.

대학은 서울에서 다니고 싶었다. 대학 진학이 당연하던 시기에 학교 이름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동생과 같은 대학을 가기를 원했다. 오빠와 언니를 대학에 보낸 후 학비 지원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대학에 연락이 왔지만 결국 지방 국립대를 택했다.

대학까지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니. 입학이 결정된 후 아버지를 원망했던 감정이 떠올랐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동생과 함께 다녔었다. 우리는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비교를 받았다. "누가 언니고 동생이니?"에서 시작해 "누가 키가 크니?", "누가 공부를 잘하니?"로 이어지는 알맹이 없는 질문들에 동생과 나는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았다. 동생과 나를 한 묶음의 사람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 대학만큼은 다른 곳에 다니고 싶었다. 따로는 못 보낸다며 엄포를 내린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렇게 3년을 기숙사에서 1년을 원룸에서 지내며 부산에서 4년을 보냈다. 마지막 학기 시험이 끝나고 신청한 프로그램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온 후 현재까지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국립대에 다닌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무리하게 서울에 올라와 대출을 받으며 다녔다면 대학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다.

홀로 네 명을 대학에 보낸 아버지. 나는 아직도 아버지께서 그 많은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아버지가 고생 많으셨겠다. 대단하시다."라고 말하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등본을 바라보며 대학 진학 후 서먹해진 관계를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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