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번째 밤
첫 인턴으로 몸담았던 회사는 애증의 장소다. 앞으로 PM 경험의 밑바탕이 된 곳이자 깊은 상처를 준 곳이도 했다. 당시 내게 PM은 개념에 가까웠을 뿐 실무 경험은 백지에 가까웠다. 나는 어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야생에 던져졌다. 슬랙 메신저에서 어떤 의견에 반대했다가 예상치 못한 부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그때부터 잘못 낙인이 찍혔는지 그 이후로 내는 의견마다 "안 될 것 같은데"와 같이 곧바로 답을 받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을 기는 듯했다.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또 같은 반응을 들을까 무서웠다.
겨우 의견 하나가 통과해 진행하면 그때부터 나는 배제되고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알아서 척척 진행했다. 이 팀은 PM이 필요 없는 것 같은데 나를 왜 뽑은 거지. 밥값도 못하는 인간이란 사실이 죄스러워 먹는 것조차 꾸역꾸역 삼켰던 나였다.
이전에 여러 기업에서 알바와 계약직을 했을 땐 적응도 잘하고 일머리도 좋다는 칭찬도 들어서 어디서든 자신감이 있었다. 그 일 이후 마음속에 무능력한 내가 자리 잡았고 또 다른 곳에서 그 모습이 들킬까 두려웠다. 작년 12월엔 무능력한 자아가 밖으로 뻗어 나왔던 시기였다. "이젠 망했어. 다들 한심하게 보겠지."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우연히 링크드인에서 PM을 위한 1:1 멘토링을 진행한다는 글을 발견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에 온라인 멘토링을 신청했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말하는 내내 스크린 속에 약하고 무기력했던 내가 비쳤다. 멘토님은 뜻밖의 얘기를 꺼내주셨다. 자신도 과거에 회사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의 실패는 그날에 두세요." 과거는 현재를 헤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날보다 분명히 나아졌다. 지금은 예전처럼 뭐부터 할지 몰라 방황하지도 않고, 동료분들에게 신뢰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 나는 과거의 무기력했던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건 피하거나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지금보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가늠할 기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