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가 정점을 찍고 쇠락기로 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CJ ENM이 2023년 1분기 어닝쇼크를 기록했습니다.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받고, 수많은 히트작을 쏟아낸 ‘스튜디오 드래곤’을 출범시켰고, ‘TVN’과 ‘엠넷’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 제작을 선도해 왔기에 충격이 큽니다. CJ ENM의 역할이 컸기에, 이러다가 K콘텐츠가 정점을 찍고 쇠락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2023년 1분기, CJ ENM은 CJ오쇼핑과 합병 후 5년 만에 첫 적자를 냈습니다. 매출은 9,49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0.9% 감소했고, 영업손실은 503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회사는 글로벌 경기 둔화로 인한 광고 시장 침체와 콘텐츠 투자 비용의 증가를 이유로 제시했습니다만, 핵심은 K콘텐츠 사업의 실적 악화였습니다.
영화/드라마 부문 매출은 2,361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2% 늘었지만, 영업손실 407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드라마 '아일랜드'와 예능 '서진이네' 등이 선방했으나, 영화 '영웅', '유령', '카운트'의 흥행 부진과 티빙의 과도한 적자 및 미국 자회사 '피프스시즌'의 실적 부진이 영업 손실 악화로 이어졌습니다. 음악 부문 매출은 1,190억 원으로 전년 대비 31.2% 증가했으나, 영업이익은 81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3.2% 감소했습니다. 다만, 엔데믹의 영향으로 'K콘 2023 태국'과 '스트릿 맨 파이터' 콘서트 등 오프라인 라이브 매출이 증가한 것은 고무적입니다.
CJ ENM이 실적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이, 넷플릭스는 4년간 3조 3,000억 원을 한국에 투자하기로 하면서 이제 주도권은 해외 OTT 사업자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콘텐츠 제작 시스템도 넷플릭스가 선호하는 할리우드 방식으로 종속될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적자가 커지고 있는 티빙이나 웨이브와 같은 국내 OTT 사업자들도 해외 OTT 사업자에게 종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글로벌 OTT의 투자가 커지면서 한국에 할리우드식 콘텐츠 제작 방식이 자리를 잡고 해외 진출의 기회가 커진 것은 고무적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할리우드에서 먹힐만한 콘텐츠에만 투자가 집중되는 경향 역시 강해질 것입니다. ‘기생충’ 같은 한국 고유의 특성을 살린 작품보다는 한국인 배우가 연기하는 할리우드식 콘텐츠가 대세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당장 극장가를 보더라도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과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휩쓸고 있고, 한국의 흥행 작품들은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에서 시리즈물로 제작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제작사들도 제작비를 보존할 수 있는 해외 OTT를 선호하고, 글로벌 시장에 이름을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우들도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 배급을 전제로 캐스팅을 수락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CJ ENM의 재무 성과가 당장 개선되기도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2022년 연간 천억 대 적자를 기록한 티빙은 넷플릭스 등과의 국내 경쟁에서 당장의 성과 개선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해외로 진출하자니 경쟁은 더욱 거셉니다. 미국 자회사인 ‘피프스 시즌’의 손실도 문제지만, 본질적으로는 CJ ENM과의 시너지가 무엇이냐라는 비판도 커지고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과 ‘글로리’가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시장에서 히트를 치고 있는 현시점에 굳이 미국에서 수백억 대 적자를 기록하며 현지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당위도 크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단기적인 수익성 개선에 매몰되어 있는 CJ ENM의 경쟁력에 의문도 커지고 있습니다. 2023년 연초 강도 높은 조직 개편으로 효율화하는 과정에서 오디션 순위 조작으로 징역형을 받은 PD를 채용하면서 대내외적으로 거센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유명 PD들도 회사를 떠나거나 자회사로 이동하면서 과거 CJ ENM의 영광이 빛을 바라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K콘텐츠가 세계적인 무대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현재 시점에 CJ ENM이라는 개별 기업 실적이 악화되는 게 대수냐라고 폄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K콘텐츠의 역사에서 CJ ENM의 발자취를 빼고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대로 K콘텐츠 세계화에 앞장섰던 CJ ENM의 실적 악화를 K콘텐츠 산업 위축의 전조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습니다. CJ ENM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시장 전체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K콘텐츠 산업의 재부흥을 위해서라도 CJ ENM의 실적 개선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