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랩 vs. 고투, 그리고 라인의 길
동남아는 슈퍼앱 패권 전쟁 중입니다. 슈퍼앱은 하나의 앱에서 다양한 버티컬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르는 말입니다. 동남아에서는 그랩(Grab)과 고투그룹(GoTo Group), 그리고 SEA 그룹이 대표적인 슈퍼앱입니다. 그랩과 SEA 그룹이 동남아 전역을 아우른다면, 고투그룹은 고젝과 토코피디아 합병을 기점으로 인도네시아 강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VNG 그룹이 '잘로'라는 메신저를 내세우고 있으며, 라인은 메신저 유저 기반으로 어떻게 슈퍼앱으로 위상을 강화할 수 있을 지 고민 중입니다.
슈퍼앱의 핵심은 다양한 서비스 제공을 통해 스마트폰에서 고객들의 시간 점유율을 높이고, 나아가 지갑 점유율(Share of wallet)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랩과 고젝은 차량 공유나 오토바이 예약을 시작으로 음식 배달, 퀵 배송, 금융 서비스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라인이나 잘로와 같은 메신저 서비스는 고객의 높은 체류 시간을 기반으로 음악이나 뉴스, 동영상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고객의 시간과 지갑을 더 점유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슈퍼앱을 지향하는 테크 회사들은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인프라’를 제공하며 슈퍼앱으로 가기 위한 저만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메신저를 기반으로 한 라인이 꿈꾸는 '라이프스타일 슈퍼앱'의 모습은 예컨대 이런 것일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뉴스를 보고("라인 투데이"), 출근할 때 택시를 불러 바로 결제할 수 있게 합니다. ("라인맨과 라인 페이").
BTS나 버스로 출근할 때 웹툰이나 영상을 봅니다. ("라인 웹툰", "라인 TV").
일을 할 때 메신저로 소통을 하고, 비디오 컨퍼런스콜을 합니다. ("라인 메신저").
스티커를 보내 친구들과 친밀감을 높이고, 스티커를 직접 제작해 돈을 벌기도 합니다. ("라인 스티커", "크리에이터스 마켓").
점심 먹을 때 음식 배달을 시키고, 무료한 오후에 버블티를 시키기도 합니다. ("라인맨").
퇴근 후 온라인으로 쇼핑을 합니다. ("라인 쇼핑")
메신저를 넘어, 추가적인 성장 동력은 무엇일까?
동남아 시장에서 '슈퍼앱'을 고민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전략적 질문들을 염두해두게 되었습니다.
왜 동남아나 중국 시장에서 유독 슈퍼앱이 화두가 될까가 먼저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모바일 시대가 되면서 '포탈'의 개념이 약해지고 각 '버티컬'별로 서비스들이 특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커머스하면 쿠팡이나 무신사, 마켓컬리, 네이버 쇼핑이 떠오르나 각각이 모두 특화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이버가 모바일 앱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첫 화면에 검색창 외에 공백을 더 두려고 하는 시도는 다양한 서비스를 한꺼번에 담는 '슈퍼앱' 방식보다 특정 서비스에 특화된 '버티컬'의 전략을 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차량공유로 시작한 그랩, 고젝과 메신저 서비스로 시작한 라인이나 잘로의 슈퍼앱 방향성은 분명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중국에서 슈퍼앱으로 성공한 위챗이 모범이 될만한 사례로 보였습니다.
동남아 테크 산업에서 슈퍼앱이 화두가 된 이유는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모바일 퍼스트’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에서는 데스크톱보다 모바일로 인터넷을 두 배 이상 더 많이 접속합니다. 또한, 메모리가 부족한 저사양 단말기가 많이 퍼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바일폰에 설치된 평균 앱 수가 현저하게 적습니다. 따라서 슈퍼앱은 중국과 동남아 등 중진국 또는 후진국에서 주요 트렌드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모바일과 데스크톱에서의 인터넷 접속 비중은 서비스 제공자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지표입니다. 웹을 개발할 때 모바일 웹만 신경 쓰면 될지, 데스크톱 웹 서비스를 같이 개발해야 할지를 항상 고민해야 하고, 이에 따라 개발 공수가 달라집니다. 소비자가 모바일에만 압도적인 시간을 쓰고 있다면 모바일에 특화된 서비스에만 집중하면 되기에 더 효율적인 자원 배분도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모바일 퍼스트 소비 행태는 동남아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020년 기준으로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는 하루 평균 5시간 이상 모바일로 인터넷을 이용하며, 말레이시아, 대만은 하루 4시간 이상 이용하고 있습니다. 동남아는 전 세계에서 모바일로 인터넷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지역입니다.
[아시아 퍼시픽 국가들의 일평균 모바일 인터넷 사용 시간 (분), 2020년]
동남에서는 저사양 스마트폰 수요가 상당합니다. Oppo, Vivo 및 샤오미 등 저가폰 기준 동남아에서 인도네시아는 70.5%로 가장 높은 비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어 필리핀,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순입니다. 일본은 저가폰 비중이 14.9%, 한국은 3.7% 수준에 불과합니다.
[국가별 저가 스마트폰 비중, 2021년 12월 기준]
그 결과, 동남아에서는 평균 앱 설치수가 적습니다. 구글에서 발표한 2016년 ‘아·태 지역 모바일 앱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한국 소비자가 설치한 평균 앱 개수는 53개로 조사 대상 10개국 중 압도적 1위였습니다. 2~3위인 싱가포르, 필리핀은 평균 설치 앱이 각각 44개, 39개 수준이었습니다. 한편,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는 30~35개 대로 하위권에 포함되었습니다.
[국가별 앱 설치수 및 스마트폰 침투율, 2016 (출처 링크)]
경쟁은 성공의 자극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랩과 고젝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벤치마킹하며 때로는 닮아가고 때로는 차별화하며 지금까지 앙상블을 이루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랩과 고젝은 세 가지 축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첫 번째는 서비스 버티컬 확장이며, 두 번째는 금융 서비스의 확장, 마지막으로는 지역적 확장입니다. 그랩은 세 가지 모두를 성공시킨 승자라면, 고젝은 앞의 두 가지만 성공시키고 인도네시아 강자로만 자리 잡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2021년 12월 기준 그랩의 기업가치는 40조가 넘는 반면, 고젝은 약 10조 원 수준으로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고젝-토코피디아와 합병 후에도 18조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랩은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설립되었습니다. MyTeksi를 서비스하다 동남아 내 지역 확장을 염두에 두고 2013년 GrabTaxi로 개명했습니다. 2014년 본사를 싱가포르로 이전하며 회사명을 Grab으로 바꾸었습니다. 이후, '그랩 페이' 서비스를 시작하며, 이월렛, 대출 서비스로 확대했습니다. 그랩의 주요 전략은 공격적 지역 확장이었습니다.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에 이어 방콕, 미얀마, 마닐라까지 동남아 400개 이상의 도시로 확장했고, 2억 번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했습니다. 이후에는 그랩 푸드, 그랩 택배 등 국가별 인프라 상황과 니즈에 맞추어 인접 영역으로 적극 확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랩은 상당한 규모의 투자를 받았습니다. 2021년 12월 나스닥에 상장할 때까지, 총 35번의 투자를 받았고, 총 투자 금액은 165억 달러(약 17조 원)를 달합니다.
한편, 고투 그룹은 인도네시아에서 오젝(ojek; 오토바이)의 이름을 딴 ‘고젝’과 이커머스 플랫폼 ‘토코피디아(Tokopedia)’ 합병을 통해 탄생했습니다. 2010년 오토바이 라이딩 콜센터로 시작한 고젝은 2015년 오토바이를 호출하는 서비스를 론칭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16년 유니콘이 되었고, 2019년 데카콘이 되었습니다. 오토바이 서비스를 시작으로 고마트와 고 푸드, 고마사지, 화물 배송 서비스인 고 박스와 고 센드 등으로 확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결제 서비스인 '고 페이'는 고객들의 편리를 크게 제고했습니다. 이후 인도네시아를 벗어나 태국, 베트남 등으로 진출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2021년 5월 인도네시아 이커머스 회사인 토코피디아와 합병을 통해 고투그룹이 탄생했습니다. 고투그룹의 가장 큰 약점은 인도네시아에 이외 지역에서의 낮은 존재감입니다. 자국 시장 주도권을 해외 경쟁자로부터 뺏기지 않기 위한 수성 전략에 집중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고투그룹은 인도네시아에서의 '슈퍼앱'의 위상을 굳혀가고 있습니다. 오토바이 예약부터 시작해, 다양한 인접 서비스로 성공적으로 확대했고, OTT 및 이커머스까지 제공하고 있습니다.
두 서비스의 성장 과정을 수년간 지켜보며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먼저 동남아 시장 안에서 타 국가로 확장하는 것이 결코 용이치 않다는 점입니다.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진출은 비교적 용이하나 반대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랩은 일찍이 싱가포르로 본사를 옮겼고, 주요 경영진도 싱가포르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타 동남아 국가로 확대했으며, 비교적 양호하게 정착해나갔습니다. 반면, 고젝은 인도네시아를 기반으로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으로 확대했으나 인도네시아 경영진이 해당 국가의 경영진에게 리더십을 발휘하기 용이치 않은 구조였습니다. 결국 태국 사업은 매각을 했고 모든 팀을 해체시켰으며, 필리핀은 철수했다 다시 도전 중이며, 베트남은 재도약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입니다.
태국은 동남아 시장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지리적으로 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 중앙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큰 경제규모를 가진 태국에서 누가 승리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랩과 고젝은 전면전을 태국에서 벌였고, 여기에 푸드 판다와 라인맨까지 가세하여 4강전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고젝은 인도네시아를 본거지로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격했고, 그랩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기반으로 태국으로 올라왔습니다. 상당히 큰 규모의 시장과 중진국 소비 수준과 문화적 소양을 지닌 태국 시장에서 어떤 성과를 올리느냐가 기업 가치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포기하기에 어려운 시장입니다. 그랩과 고젝 모두 태국에서 끊임없이 불법 논란에 시달렸으나, 어떻게든 버티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테크 탤런트(Tech Talent)' 확보입니다. 수년간 이 문제를 고민한 제 결론은 우수한 개발인력을 동남아에서 구하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태국, 인도네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베트남 개발 인력도 최근에 부상하고 있기는 하나 고급 인력들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랩이 최종적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싱가포르를 기반으로 중국 센젠의 개발 인력들을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2018년까지만 하더라도 그랩은 사용하기 불편할 정도로 사용성이 별로였습니다. 하지만, 2018년 이후 중국의 개발 인력들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앱의 사용성이 확연하게 증대되었고, 가장 안정적인 앱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원빌드의 힘'입니다. 그랩은 동남아 전역에서 원빌드 전략을 고수했습니다. 가장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리소스가 개발 인력이기에 원빌드 전략 하에 개발을 차근차근 고도화해 나갔습니다. 한편, 고젝은 나라마다 다른 브랜드와 앱으로 접근했는데, 그러다 보니 동남아 전역을 이동하는 고객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랩은 싱가포르에서 태국으로 오더라도 같은 그랩 앱을 쓰면 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태국을 오는 경우, 고젝 고객들은 'Get'이라는 고젝의 태국 버전을 새롭게 설치해야만 했다. 브랜드 마케팅과 제작 인력의 시너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셈이고, 결국 태국 시장에서 철수했습니다. 한국 회사들이 해외 진출할 때 일반적으로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앱 서비스를 고려합니다. 하지만 이후 여러 개의 나라를 각각의 앱이나 서비스로 확장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가장 비싼 리소스 중 하나인 개발 인력들을 지속적으로 채용해야 하고 서비스 관리의 복잡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라인은 그랩, 고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슈퍼앱 전략이 필요합니다. 고젝은 승차 공유와 음식 배달을 기반으로 한 생활밀착형 O2O 서비스라면, 라인은 메신저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입니다. 오히려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슈퍼앱 전략을 핀 중국의 텐센트 위챗이 적절한 벤치마킹 대상이었습니다.
위챗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치며 '슈퍼앱'의 위상을 탄탄히 다져왔습니다.
— 2011년, 메신저 서비스 론칭
— 2012년, 모멘트(Moments, 펑유취안, 朋友圈) 시작 (일종의 페이스북 타임라인)
— 2012년, 공식 계정(궁중하오, 公众号) 서비스 론칭
— 2013년, 위챗페이(웨이신즈푸, 微信支付) 연계
— 2017년, 미니프로그램(샤오청쉬, 小程序) 론칭
— 2020년, 채널스(Channels, 스핀하오, 视频号) 론칭 (숏폼 비디오)
특히, 위챗의 미니 프로그램은 위챗의 위상을 기존 메신저에서 슈퍼앱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미니 프로그램 수는 2018년까지 230만 개를 돌파했으며, 다른 플랫폼에서 작동되는 미니 프로그램까지 합산할 경우 2020년까지 500만 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제 중국 소비자들은 위챗만 있다면 굳이 다른 서비스를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중국에서는 애플 앱스토어는 작동하나, 안드로이드 마켓은 구글의 철수로 작동되고 있지 못하고 그 결과 다양한 사업자들이 자체적인 앱스토어를 운영하며 혼돈의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텐센트, 바이두, 360 모바일 어시스턴트 등의 중국 IT기업들이 만든 앱 마켓과 차이나 유니콤, 차이나 모바일 같은 통신사와 화웨이, 샤오미, 오보, 비보 등의 중국 휴대폰 제조사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앱 마켓 등 사분오열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챗 미니 프로그램에는 거의 모든 앱의 기능이 구현되고 있습니다. 예약, 1:1 채팅, 결제, 주문 등 일반적인 앱에서 구현할만한 기능들이 미니 프로그램에서 구현이 되니, 거의 모든 브랜드와 서비스가 미니 프로그램 생태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달 앱을 유지하는데 약 1~4만 위안 (약 170~680만 원)만 부담하면, 기존 애플/구글 앱 결제 수수료 30%가 무료이며, 홍보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미니 프로그램의 용량이 10메가를 넘을 수 없습니다. 용량이 크고 무거운 서비스는 미니 프로그램으로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고객들 대상으로 푸시 알림 기능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미니 프로그램이 500만 개가 넘어 이 안에서 고객의 눈에 띄기 위한 경쟁을 해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 십 개의 미니 프로그램이 생기고 있습니다.
2020년 4월 기준, 월간 사용자가 100만 명이 넘는 미니 프로그램이 1,200개로 전년 동기 대비 50% 가까이 성장했습니다. 월간 이용자 수도 약 8.5억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약 25% 성장했습니다. 위챗의 미니 프로그램은 중국의 앱 생태계를 완전히 바꾸고 있습니다.
위챗은 메신저를 제공하는 다른 회사들에게 미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용자를 보유한 메신저 회사들은 미니 프로그램과 같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더 많은 고객을 대상으로 체류 시간을 늘리고 소비를 증대시키고 싶을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이제는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중국이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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