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프롬프트 페이의 간편 결제 혁신을 보며
태국 레스토랑에서는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스캔해 결제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요즘에야 한국에서도 간편 결제를 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나 신용카드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스캔하면 자신이 이용하는 은행 앱을 활용해 레스토랑에 간편하게 송금합니다. 태국은 이제 아세안 국가 중에서도 QR코드 결제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비자(Visa)의 리서치에 따르면, 2021년 태국의 QR 코드 결제 사용률은 52%이며, 그 뒤로 인도네시아 50%, 싱가포르 36%, 캄보디아 36% 순이었습니다.
[QR 코드 결제 사용률]
신용카드에 익숙하던 저로서는 낯선 풍경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태국에서 주재원으로 워킹 비자를 받아 현지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행 앱을 처음 설치했을 때는 당황스러웠습니다. 현지 1위 은행인 카시콘 뱅크에서 은행 계좌를 만들고, 앱을 설치했으나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지 USIM칩을 넣어도 안되기는 마찬가지라 당황스러워하던 중에, 은행에 직접 가서 인증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행원이 제 신분증을 받아 신분을 확인한 후 제 스마트폰으로 인증 코드를 보내면 이를 입력해 인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을 인증하는 방식이라 스마트폰을 바꾸고 앱을 깔면 다시 인증해야 하는 불편함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인증을 거치자 현지 은행 앱은 너무 편리했습니다. 별다른 인증 절차 없이 상대의 계좌번호로 간편하게 송금할 수 있고, 계좌번호를 모르더라도 전화번호만 알면 송금이 가능합니다. 개인 정보 노출이 우려된다면 돈을 받는 이가 QR 코드를 간단히 만들어 보내주면 해당 QR 코드를 스캔하는 것만으로 송금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기존 은행들이 공인인증서나 보안카드에 고착되어 있을 때, 토스나 카카오페이와 같은 스타트업들이 편리함을 내세워 기존 은행 서비스를 혁신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국은 기존의 대형 은행들이 주도적으로 핀테크 산업을 혁신하고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대형 은행들이 어떻게 핀테크 산업 혁신을 주도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태국은 대형 은행들이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태국 시가총액 기준 상위 20개 회사에 카시콘 은행, 방콕 은행, 시암 커머셜 은행, 타나찻 은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조직도 커서 민첩함이나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태국 핀테크 혁신의 시작은 중국 알리페이가 2014년에 태국 시장에 진출하면서부터입니다. 이듬해인 2015년에는 위챗 페이가 태국에서 활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알리페이와 위챗 페이가 태국 시장을 주목한 이유는 중국인 관광객 때문입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 기준 약 4,000만 외국인 관광객 중 중국 관광객은 1,100만을 기록했습니다.
현지 은행들이 위협을 느꼈던 것은 당연하고, 태국 중앙은행 입장에서도 태국에서 일어난 거래가 태국 당국을 거치지 않자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이에 태국 중앙은행은 2016년 외국의 간편 결제 서비스에 대해 강도 높은 경고를 전달했고, 알리 페이는 태국의 현지 2위 통신사가 운영하는 '트루 머니'에 지분 참여를 통해 우회적인 방법으로 태국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태국 중앙은행 주도로 2017년 간편 결제 서비스인 '프롬프트 페이(Prompt Pay)'가 론칭되었고, 태국 내 주요 은행들이 모두 회원사로 참여했습니다. 이제 고객들은 은행 앱을 통해 간편하게 프롬프트 페이를 이용하고 은행 간 거래도 5,000밧 (약 2만 원) 이하라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국 소비자 관점에서는 매우 훌륭한 금융 인프라가 구축된 셈입니다. '프롬프트 페이'는 매년 거래액이 급상승하고 있습니다. 태국 중앙은행에 따르면, 2018년부터 매년 거래액이 1.5배 이상 증가하고 있으며, 2021년 32.7조 밧 (약 1,240조 원)을 기록했습니다. 2021년 말 기준으로, 태국 인구 7천만 중 약 5천6백만 명이 해당 서비스를 이용 중입니다. 프롬프트 페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도 연계하여 양국의 소비자들은 별도의 환전 없이 바로 QR 코드 결제가 가능합니다. 결제 시점의 실시간 환율을 적용받을 수 있어 편리성에 더해 투명성이 배가되었습니다.
[태국 프롬프트 페이 결제액 추이 (2017~2021, 십억 밧)]
하지만, 소비자들에게는 혁신적인 '프롬프트 페이'는 은행을 제외한 핀테크 사업자들에게는 폐쇄적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프롬프트 페이'와 유사한 싱가포르의 '페이나우(Pay Now)'의 경우, 싱가포르 주요 은행뿐만 아니라 그랩 페이나 싱텔에게 참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롬프트 페이'는 오직 은행에게만 참여를 허용하고 있어 핀테크 회사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라인은 태국에서 결제 서비스 제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합작 법인의 길을 택했습니다. 라인 페이는 태국에 2015년 첫 선을 보인 후, 2016년 '래빗 라인 페이' 합작법인을 설립했으며, 2018년 3월 태국 1위 이동통신 사업자(AIS)로부터 증자를 받으면서 3자 합작 법인을 만들었습니다. AIS의 모바일 결제 사업 자회사인 엠페이(mPay)로부터 투자를 받으며, 라인-래빗(BTS 서비스)-AIS(1위 통신사) 간 1/3씩 지분을 소유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라인이 래빗과 파트너십을 택한 이유는 래빗이 운영하는 충전식 래빗 카드가 태국의 대중교통을 포함한 총 4,000여 개 이상의 가맹점을 기반으로 5백만 명 이상이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력한 현지 사업자와 파트너십을 맺었음에도 기존 은행들이 강하게 수성하고 있는 결제 서비스에서 경쟁하기는 녹녹지 않습니다.
디지털 결제 부문이 아세안 핀테크 전장의 서막이었다면, 다음 전장은 디지털 은행입니다. 디지털 결제가 어느 정도 주요 사업자에 의해 시장 구조가 짜였다면, 디지털 은행은 이제 막 시작 단계입니다. 공식적인 시작은 싱가포르에서 출발했습니다. 싱가포르 정부는 2020년 12월 4곳에 디지털 은행 설립을 허가했습니다. 그랩-싱텔 컨소시엄, SEA 그룹, 앤트 파이낸셜 및 그린란드 홀딩스 컨소시엄이 그 대상입니다.
인도네시아는 디지털 뱅크에 대한 새로운 프레임웍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가시화 단계이나 산업 자본이 기존 은행 인수를 통해 디지털 뱅크 서비스를 출시할 수 있게 할 전망입니다. 이에 따라 주요 대형 사업자들이 출사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현지 BCA은행, BRI은행에 더해 고젝 등 소위 테크 자이언트도 시장에 진입할 계획입니다.
태국은 공식 라이선스 발행을 목표로 검토 중이나 아직까지는 구체화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라인은 현지 1위 은행 사업자인 카시콘 뱅크와 합작 법인을 만들어 '라인 BK'를 설립했습니다. 서비스명에 'BK'를 쓴 이유는 공식적으로 은행이라고 할 수 없어, 뱅크(Bank)와 발음이 유사한 서비스명을 채택한 결과입니다. '라인 BK'는 2020년 10월 공식적으로 론칭하며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은행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시콘 뱅크의 인프라를 활용하며, 라인 메신저를 통해 송금, 자유 입출금 통장 개설, 개인 신용 대출, 결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라인 페이와 라인 BK 론칭을 지켜보면서 '합작법인'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명확지 않은 현지 규제를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성이 높은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핀테크 사업은 고객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논의 이전에 하루하루 사업의 론칭 및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합작 법인은 결혼만큼이나 어렵고 신중해야 하는 선택입니다. 어떤 파트너를 선택할지, 그 파트너와 화학적 결합을 할 수 있을지 명확해야 하며, 현지의 문화적, 규제적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무 임직원들은 수많은 고충과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특히나 명확한 권한과 책임 설정을 상대적으로 등한시하는 한국계 기업의 경우, 현지에서 담당자가 주도적으로 업무를 처리하기 힘들고 이는 결국 파트너사와의 불협화음을 발생시키는 경우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태국 시장을 포함한 아세안 시장에서 핀테크 혁신은 이제 시작입니다. 핀테크 산업은 현지 은행뿐 아니라 앤트 파이낸셜과 소프트뱅크, 미국계 투자 회사와 더불어 그랩, 고투 그룹, SEA 그룹과 같은 아세안 슈퍼앱들의 대리전이 되고 있습니다. 이 틈바구니에서 한국계 회사들이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아니 도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박수를 보내야 할 듯합니다. 현지 유수 사업자와 합작법인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절반의 성공에 가까워진 것에 진배없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그 합작법인을 얼마나 조화롭게 운영할 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통제권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 한국 기업들에게는 이래저래 엄청난 도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