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캐리 중인 대기업 CVC

은행부터 해산물 가공 회사까지

by 경영로스팅
은행, 통신사, 시멘트 회사, 정유 회사, 부동산 회사, 해산물 가공 회사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회사들이나 태국에서는 하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Corporate Venture Capital)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동남아 시장에서 태국 스타트업은 여전히 작은 규모입니다. 싱가포르 기반 '센토 벤처스'에 따르면, 태국 스타트업에 투자된 금액은 2019년에 동남아 전체 투자금의 4%, 2020년에는 5%에 불과합니다. 한가지 더 흥미로운 점은 투자금의 대부분이 일반 벤처캐피탈이 아닌 대기업 CVC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업계에서는 태국 전체 투자금의 약 80%가 대기업 CVC가 투자하는 금액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태국 대기업 CVC의 시작은 은행이었습니다. 2016년, 태국 최초 상업 은행인 시암 커머셜 뱅크(SCB)가 SCB 10X (당시는 디지털 벤처스)를 만들었고, 현재까지 2,000억원이 넘는 금액을 투자했으며, 별도로 6,000억원이 넘는 펀드를 조성했습니다. 2017년, 쿠룽스리 은행은 피노베이트(Finnovate) CVC를 만들었고, 1,000억원이 넘는 펀드를 조성했습니다. 카시콘은행 역시 2017년 비컨(Beacon) CVC를 만들고 500억원이 넘는 펀드를 결성했습니다. 이후 다른 태국 선도 대기업들도 CVC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에는 시암 시멘트 그룹과 정유 회사인 PTT, 부동산 회사인 아난다 어반 테크, 2018년에는 다른 부동산 회사인 산시리, 맥주 회사 싱하가 대기업 CVC를 출범시켰고, 2019년에는 해산물 가공회사인 Thai Union도 CVC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대기업 CVC는 태국 스타트업 생태계 발전에 그리 도움을 주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모회사와 시너지가 나야 하고 일정 규모 이상 되어야 하기에 오히려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 유럽, 이스라엘, 또는 미국에 있는 시리즈 B 또는 그 이상의 회사에 집중해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시드나 시리즈 A 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 많은 태국 스타트업은 소외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대기업 CVC는 대기업 명성과 높은 복리후생을 앞세워 정작 스타트업에 관심 있을만한 유능한 인재들을 흡수해갔습니다. 스타트업이나 투자 경험이 많지 않은 사회 초년생을 채용하면서 시장에 스타트업 생태계에 오히려 악효과를 주는 듯 했습니다. 제가 만나본 CVC 심사역 대부분이 창업이나 과거 사회 경험이 몇 년 안되는 주니어 분들이 많았습니다. 나아가 코로나는 후발주자로 시작했던 CVC들이 투자 계획을 축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난다, 산시리, 싱하 등의 CVC는 애초 계획을 축소하거나 철폐하면서 시장 상황을 관망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2018년을 전후로 싱가포르 기반의 Cento Ventures, Gobi Partners, Open Space 등의 벤처캐피탈들이 태국 스타트업에 투자를 적극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 때, 태국 대기업 CVC들이 해외 투자를 넓히고, 펀드의 LP로 참여하고 동남아 스타트업 생태계의 다양한 이들과 네트워킹을 한 것이 글로벌 벤처 캐피탈 투자에 긍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라인 태국도 현지 스타트업에 2018년부터 투자를 시작했으며, 2개의 현지 스타트업을 100% 인수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 라인 스케일업 엑셀레이터를 통해 현지 스타트업과 라인과의 시너지를 제고하고자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2018년이 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중요한 마일스톤이었습니다. 다양한 CVC가 시장에 진입하면서 태국 스타트업들에 대한 네트워킹이 강화되었고, 테크소스 글로벌 컨퍼런스가 시작되며 싱가포르를 포함한 다양한 투자자들을 태국 생태계로 끌어들였습니다. 대기업 CVC가 생태계에 관심이 높다는 점은 시리즈 A 또는 시리즈 B 투자에 관심 있는 벤처 캐피탈에게 매각 가능한 회사가 존재한다는 의미였기에 투자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9년에는 '위워크'가 태국에 공식 진출했고, 대규모의 '트루 디지털 파크'가 새롭게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기업 CVC가 초반에는 태국 생태계에 기여하는 바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잠재력과 도전정신이 기반이 되어야 하는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는 작은 연결 하나하나가 힘이 되어 새로운 변화를 위한 변곡점을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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