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996년 알렉스 가랜드의 소설 <비치, Beach>는 당시 태국 배낭여행자들의 필독서였습니다. 2000년도에 대니 보일 감독이 영화화하면서 더욱 유명해졌고, 이 영화의 촬영지인 피피 섬은 반드시 가봐야할 여행지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배낭여행을 하면서 저 역시 <비치>에 심취해있었습니다. '카오산 로드'에서 시작된 여정이 '낙원의 섬'으로 무대가 옮겨가면서 그 여정을 따라가고 있었고, 그렇게 인생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방콕은 ‘여행자의 천국’을 넘어, '아세안 실리콘밸리'로 가는 첫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태국의 디지털 경제는 2012년을 시작으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입니다. 향후 10년은 과거 10년보다 더 빠르게 발전될 것으로 예상되어, 태국은 아세안 테크 산업의 허브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는 관광과 제조업을 넘어 테크 산업이 태국 경제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2017년부터 시작된 태국 테크 산업과의 인연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2017년부터 3년 조금 넘게 태국 테크 산업 일선에서 발로 뛰면서, 그리고 코로나가 터진 2020년부터 한국에서 태국 테크 산업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난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방콕이 변모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방콕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채비를 마쳤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 역시 2017년 태국 테크 산업에 첫발을 내딛은 이후, 생각의 지평이 훨씬 넓어졌음을 느낍니다. 태국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존재했기에 가능한 몇 가지 소중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세상을 담기에 컨설팅의 프레임은 너무 좁았습니다. 10여년간의 컨설팅 경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좁은 프레임에 가두는 것이 익숙했습니다. 그 프레임 안에서 문제를 마음껏 쪼개 요리할 수 있었고, 해결책을 찾는 순간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역설적으로 프레임이 작을수록 문제를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서로 다른 개성과 배경을 지닌 동료들을 설명하고 이 순간의 복잡한 문제를 설명할 '만능 프레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프레임을 찾아 분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의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깨달았습니다.
명확한 소통은 어렵습니다. 아니 애초에 불가능할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소통은 6단계를 거치며, 그 과정에서 많은 생략과 오해 또는 왜곡이 발생합니다. 1) 내가 생각하는 것, 2)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 3) 실제 말로 하는 것, 4) 상대가 듣는 것, 5) 상대가 듣고 해석한 것, 6) 해석을 통해 실제 이해한 것 등 소통은 6단계를 거칩니다. 흔히 명료하게 전달했다고 하지만 자신의 말을 녹음해서 들어보면 2단계와 3단계 사이에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1단계와 4단계간 오해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5단계와 6단계는 인내와 신뢰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 밖에 답이 없습니다. 소통을 명확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것도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두려움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일을 하는 과정은 ‘신뢰’와 ‘실망’의 반복입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다치지 않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실망하지 않기 위한 과잉 방어는 불필요한 장벽을 만들고, 과도한 신뢰는 배신을 불러일으킵니다. 신뢰와 실망을 반복하며 지쳐갈 것인지, 그럼에도 자신을 잃지 않고 균형점을 찾을 것인지는 온전히 자기 선택에 달렸습니다. 낯선 타지에서 사는 생활은 스스로를 낯설게 만듭니다. 그 순간 생기는 두려움을 대면하고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장과 조직에의 기여를 선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 쉽게 가정하지만, 회사를 다니는 이유가 성장과 기여인 사람은 의의로 소수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자석과 같습니다. 성장과 기여를 추구하는 이들은 비슷한 이를 끌어당기고 다른 성향의 이들을 밀어냅니다. 성장과 기여가 아니라 회사 브랜드가 주는 자존감과 평안, 안정적 수입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이 있는 동료들과의 친목이 더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도전이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를 얼마나 빨리 깨우치느냐에 따라 본인의 평판이 결정됩니다. 평판은 보통 성과보다 다수결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깨달음은 태국어의 <사바이 사바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천천히, 여유있게’를 뜻하는 이 말은 조급하게 살 필요도 없고, 당장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는 화두를 제시합니다. 조금 한가로워도 되고, 문제는 곧 다른 문제로 대체되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요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태국은 수천 가지 미소의 나라입니다. 늘상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여유로움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미소의 이면에는 삶에 대한 여유와 너그러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 정신과 문화가 태국인들의 <사바이 사아비>에 담겨있습니다.
<사바이 사바이> 한 개인이 그렇게 천천히 성장하듯, 방콕 역시 서서히 아세안을 대표하는 실리콘 밸리로 변모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