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I 로스팅

아가사 크리스티의 글쓰기 강의

AI로 재탄생한 고인의 디지털 휴먼

by 경영로스팅 강정구

죽은 자가 다시 강의하고 있습니다.


2025년, BBC Maestro는 고인이 된 아가사 크리스티 작가를 강단에 세웠습니다. 생전의 말투와 표정, 어조까지 되살린 디지털 휴먼이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교육과 기억을 재구성하는 기술의 실험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강의는 단순한 음성 합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AI는 크리스티의 저서, 인터뷰, 편지, 미공개 자료까지 총동원해 대사를 만들고 얼굴과 목소리를 구현했습니다. 수강자는 작가 본인의 말투로 구성된 강의를 실시간으로 듣습니다. 마치 시간의 문이 열리고, 그녀가 다시 강단에 오른 듯한 감각이 생깁니다.


총 11편의 강의는 추리소설 작법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 반전의 설계, 단서 배치 전략까지 AI는 이 모든 내용을 크리스티의 어조로 정제해 전달합니다. 살아있는 목소리로 죽음 너머의 노하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복원 기술은 작가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업가의 철학, 리더의 연설, 예술가의 비평도 데이터만 충분하다면 복원될 수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의 창업 강연, 이건희 회장의 메시지도 다시 들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박경리 선생의 음성이 다시 들린다면 “글은 견디는 일입니다”라는 말이 가슴에 깊이 박힐지도 모릅니다. 이어령 선생의 눈빛과 함께 “질문이 먼저입니다”라는 메시지가 재현된다면 우리는 잊고 지냈던 사고의 윤리를 되새기게 될 것입니다. 그 말들은 다시 살아나 우리를 향해 조용히 말을 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감동은 윤리적 물음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이 강의에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유족의 협력이 있었다 해도 복원된 콘텐츠가 고인의 의도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기술은 재현을 가능하게 하지만 진실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복원된 목소리는 언제든 편집될 수 있습니다. 하지 않은 말을 한 것처럼 구성되거나 전혀 다른 맥락에 배치될 수도 있습니다.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질문입니다.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디지털 휴먼을 사용할 경우 정보 전달만이 아니라 그 인물의 신뢰 자산까지 함께 사용됩니다. 콘텐츠 제작자는 그 무게를 인식해야 합니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윤리의 문제입니다.


동시에 잊힐 권리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합니다. 기술은 죽음을 종결로 보지 않습니다. 데이터는 언제든 호출될 수 있으며 이는 사후 프라이버시와 직결됩니다. 정보 활용과 기억의 존중 사이에서 우리는 아직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감동의 순간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듣지 못한 부모의 음성, 스승의 조언, 작가의 언어가 다시 살아나는 순간은 강한 몰입과 위로를 줍니다. 죽은 반려묘나 반려견도 되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진정성은 콘텐츠의 맥락과 설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AI는 기억을 확장하는 기술입니다. 그러나 기억을 설계하고 사용하는 일은 인간의 몫입니다. 기술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은 언제나 내용이며, 그 목소리를 부를 이유와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이 목소리는 정말로 다시 들을 준비가 된 것입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AI 시대, 응답 과잉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