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소버린 AI 전략’의 다음
2025년 5월, 말레이시아의 AI 전문기업 스카이배스트(Skyvast)는 ‘국산 풀스택 AI 인프라’ 구축을 발표했다.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AI 모델을 국산 기술로 개발하고, 데이터는 말레이시아에 저장하며 운영과 서비스도 현지 인력이 맡겠다고 밝혔다. 이는 자국 데이터와 기술을 직접 통제하겠다는 ‘소버린 AI’ 전략이었다.
스카이배스트는 ‘AlterMatic DT250 AI’ 서버를 핵심 장비로 내세웠다. 이 서버는 8개의 고성능 GPU를 탑재해 높은 연산 성능과 에너지 절감을 실현한다고 강조했다. 2026년까지 3,000개 GPU를 전국 주요 거점에 배치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국산’이라는 이름과 거리가 있었다. 스카이배스트 서버는 화웨이 Ascend GPU를 사용했고, AI 모델은 중국산 대형 언어모델 딥시크(DeepSeek)에 의존했다.
이 사실은 곧 논란을 불러왔다. 말레이시아가 중국 기술권에 편입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미국과 일부 국가는 이 선택이 외교·안보에 새로운 부담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특정 국가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며 기술 협력의 성격을 강조했다. AI 소프트웨어는 오픈소스 기반으로 글로벌 생태계와 연계될 것이라는 해명도 내놨다. 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중국은 일대일로와 디지털 실크로드 전략을 통해 아세안에 AI 인프라와 디지털 네트워크를 제공하며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화웨이와 알리바바는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데이터센터를 세우고, 관리와 업데이트를 중국 본사에서 통제한다.
표면적 협력은 점차 종속으로 바뀌고 있다. 중국 AI 시스템을 도입한 국가는 다른 기술로 전환하기 어렵다. 서버 교체, 데이터 이전, 인력 재교육에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기술 선택은 국가의 전략과 미래를 구속하는 족쇄가 될 수 있다.
중국 AI 기술은 감시와 통제를 가능케 하는 구조를 품고 있다. 얼굴 인식, 행동 분석, 예측 치안 같은 기술은 사회 관리에 활용돼 왔다. 아세안에서 이 기술은 권력이 자유를 억누르는 도구로 변할 위험을 안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자동차와 제조 기술로 아세안 시장을 공략했다. 도요타, 혼다, 닛산은 현지 생산과 수출 거점을 구축했다. 한국의 삼성, 현대자동차, 포스코도 제조업을 기반으로 일본의 뒤를 이어 아세안에서 입지를 넓혀왔다.
하지만, 아세안은 지금 중국 기술과 자본의 집중 투자 속에서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태국은 중국 EV 기업의 투자를 받아 전기차 생산의 중심지가 됐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라오스는 AI, 클라우드, 스마트시티를 중국 기술에 기대며 성장하고 있다.
아세안의 AI 기술 선택은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 질서를 결정하는 문제다. 각국은 데이터 주권을 지키기 위한 독자적 방안을 모색하거나, 현실적 필요에 따라 중국과 미국의 기술을 받아들이며 균형을 고민하고 있다. 기술 종속과 자립 사이에서 그 경계를 어디에 그을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이 소버린 AI 기술을 확보한다면, 그다음 단계는 분명하다. 아세안은 기술 수요가 크고, 데이터 주권과 기술 독립을 존중하는 협력 모델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지금 우리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미래는 남이 그어놓은 경계 안에서만 움직이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