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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Feb 21. 2019

그래서 나는 양보하지 않기로 했다.



편안함과 편함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나는 남자 친구에게 가장 편안함을 주는 존재이길 바랐지만 그렇다고 언제든 편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7년째 함께 하는 남자 친구와 내게 연애 초반과 지금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바로 ‘시간’ 일 것이다. 하루 종일은 물론 마음만 먹으면 일주일 내내 만날 수 있었던 (뒷받침할 체력까지 좋았던) 캠퍼스 커플은 취준생이 되며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길어지는 취준으로 그마저도 마음 편히 데이트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처음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로를 열렬히 알고 싶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연애 초반 우리는 충분히 신뢰를 쌓은 상태였고 이대로라면 바쁜 시기도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취미가 100개인 데다 주로 혼자 골몰하는 류의 취미를 가진 나는 어차피 주기적으로 혼자 만의 시간이 필요한 터였다. 그렇다고 방임하는 관계는 내 타입이 아니었다. 시간 단위는 아니더라도 장소가 바뀌거나 일정이 생겼을 때만큼은 빠짐없이 연락하자는 주의였고 남자 친구 역시 연락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우리 사이에 연락으로 문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남자 친구가 ‘그’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원하던 회사에 졸업 전에 취업을 하는, 헬조선 문과생으로서 분수에 맞지 않는 행운에 감사하며 그는 진심으로 회사에 충성했다. 3개월의 수습 기간에는 연락 두절이 일상이었다. 성실함을 타고난 데다 주위의 평판에 민감한 편이었던 그는 1시간 일찍 출근했고 자정에 퇴근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준비하는 건 습관이었지만 퇴근 시간은 사내 분위기였다. 하루에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며 단 1초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그를.. 쉽지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취업난을 뚫은 것만도 대견한데 살인적인 업무 강도에도 군소리 없이 칭찬까지 들으며 근무하는 그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남자 친구나 나나 뼛속까지 노예근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안쓰러웠지만 나도 얼른 제대로 된 곳에 취업해서 직장인 커플이 되고 싶었다. 주중에는 각자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은 곳으로 여행 가는, 학생 때와는 또 다른 즐거운 일상을 꿈꾸었다. 당장 연락이 잘 되지 않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가치 있는 희생이었다. 그리고 더 나은 그 날은 오지 않았다.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 했다. 그는, 아니 그의 회사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고 인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평일 저녁 데이트는 꿈이었고 주말에도 밥 먹듯 출근하는 그를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처음엔 이해했다.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힘든 건 본인일 텐데 투정 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현명한 연인이라면 상대가 힘들 때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하는 거니까... 그땐 그게 그를 배려하는 것이었고 우리 관계를 위한 일이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어느덧 그는 4년 차가 되었다. 회사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점점 더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듯했다. 7명이던 팀은 3명이 되었고 그마저도 남자 친구를 제외한 모든 팀원들이 신입이 되어 있었다. 모든 업무의 키를 그가 쥐고 있는 것 마냥 전 직원이 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점점 더 연락하는 횟수가 줄었고 겨우 잡은 약속도 취소되기 일쑤였다. 주말에 잠깐 만나는 시간 동안 피곤함에 정신을 못 차리는 그가 언제부턴가 안쓰럽지 않았다. 야속했다. 우리 소중한 데이트인데 반시체가 된 그를 보며 화가 치솟았다. 유치한 줄 알면서도 “일이야, 나야?” 같은 질문으로 그의 숨통을 조였다. 연애 초반부터 지금까지 늘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많은 쪽은 나였다. 늘 그래 왔고 그게 좋았기 때문에 데이트 코스에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아무 계획 없이 만나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만 같은 데이트에 진저리가 났다. 전쟁 같은 한 주를 보내고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시간일 내 곁에서 그가 하고 싶은 건 오로지 쉬는 것뿐인 듯했다. 편하게 늘어져 있는 그의 모습이 싫었다. 그에게 내가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하는 연인이 아니라, 안락한 휴식처가 되어 간다는 게 끔찍했다. 예전에는 일이 많은 걸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교감할 한 줌의 틈조차 없이 바쁜 건, 적어도 상대에게는 나쁜 것이었다.



결혼 준비를 앞두고 한창 예민해져서일까. 근래 들어 더 자주 싸우게 되었고 이번 주말에는 정말 서운함이 봇물 터지듯 터져 버렸다.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가시 돋친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혼자 준비하는 기분 들지 않게 해달라고 빌지 않았느냐고, 항상 우리를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정작 나는 매일 뒤로 밀려나는 느낌이라고, 군소리 없이 기다리는 건 그걸 이해하고 좋아해서가 아니라고... 어쩔 수 없으니 이 악물고 참고 견디는 거라고 거의 울부짖다시피 했다. 오래 만나는 동안 우리가 좋아하던 주위 연인들이 헤어지는 과정을 수없이 보았다. 상황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 상대가 익숙해지고, 주객이 전도되고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일상에서 지워져 갔다. 결국 견디지 못한 쪽에서 먼저 포기하면, 그렇게 이별이 되었다. 무서웠다. 우리는 그들과 다를 거라는 가냘픈 희망이 맥없이 흔들렸다.






언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내와의 저녁 약속이 갑작스러운 회사 일정으로 취소되었다. 이럴 때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누군가는 아내에게 김치볶음밥 한 번 못 해주는 게 무슨 큰 일이냐고 하지만, 아니다. 미뤄지는 약속, 취소되는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그게 익숙해지고, 그렇게 조금씩 서로가 일상에서 지워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양보하지 않기로 했다. 개인 시간을 양보하는 것이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먼저 잡힌 개인 약속을 중요시 여기는 것을 회사가 당연하다고 인식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사랑해서 언제까지나 무식하게 이해하고 기다리는 건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어쩔 수 없으니까 이해하길 바라는 시간은 이제 끝났다. 당장 미움받더라도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날이 있다면 반드시 우리의 시간을 선택하는 것이, 그게 정말로 우리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믿는다.


우린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관계야.

나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야.


너와의 관계를, 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나는 이기적으로 우리를 가장 먼저 챙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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