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리브 Jun 10. 2019

가장 약해질 때, 네 편이 될게.



"피트니스 센터 등록하는 것 좀 도와줄래?"  좀처럼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지 않는 편이었던 전 남자 친구가 어쩐 일인지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다음 말만 아니었어도 그렇게까지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으리라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각한다. "너 영어 잘하잖아."



당시 난 영어를 잘한다기보다는 그냥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 늘 발목을 잡았던 시험 성적과 달리 회화만큼은 독학으로 실력을 키웠다는 자부심이 제법 있었고 그의 부탁은 그런 나의 노력을 인정해준 것만 같았다. 멋지게 도와주면서 매력 발산을 하는 상상을 하며 자신 있게 센터로 향했다. 정말이지 평소라면 아무 문제없을 상황이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된 건지 매일 같이 반복하던 생활 영어 수준의 회화가 그 날따라 어찌나 낯설던지... 쉬운 단어도 좀처럼 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어찌어찌 등록을 마친 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서둘러 센터를 나섰고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 친구는 한참을 팸플릿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별 거 아니네.” 당황스러움과 무안함을 억누른 채 고군분투하던 5시간 같은 5분의 시간은 그 한 마디와 함께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고 그 날 이후 전 남자 친구 앞에서 영어를 쓰는 일은 없었다.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완벽한 모습보다 빈틈을 보일 때 상대에게 더 매력을 느끼곤 했다. 평범한 친구에서 '절친'으로, 그냥 연인에서 '내 반쪽'이 되는 순간은 언제나 의외의 타이밍에 찾아왔고 나는 그 시간을 몹시도 사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이 오히려 관계를 멀어지는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 남자 친구에게 빈틈을 보였던 그 날 나는 이미 스스로에게 상처를 받았고 몹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당황했을 텐데 고맙다고, 덕분에 도움이 되었다는 인정 비슷한 무언가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무심한 말은 당시의 내게 평소보다 더 큰 상처로 다가왔고 그렇게 조금씩 마음을 닫게 되었다. 관계를 돈독하게 또는 소원하게 만드는 계기는 빈틈을 보이는 그 순간이 아닌, 이후 대처하는 상대의 태도에 있었다. 당황스러워할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의 자존심을 어떻게 지켜주느냐 를 충분히 고민하는 건 너무나 중요했고 이미 가까운 사이라면 그 방식은 더욱 세심해질 필요가 있었다.



얼마 전 이직을 준비 중인 남자 친구로부터 자기소개서를 봐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았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할 수 있었던 그에게 제대로 된 구직 준비는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었고 아마 많은 부분에서 당황스러웠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자소서를, 다른 사람도 아닌 연인에게 보여주기로 한 결심은 처음 취준을 할 때에도 묻기 전에는 절대 자신의 상황이나 계획을 공유하지 않던 그에게 짐작건대 상당한 용기이자 상처였을 것이다. 나름 3년 차 리크루터로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욕이 솟아나 마구 피드백을 하려던 찰나, 과거의 아픈 기억이 겹쳐졌다. 전 남자 친구에게 마음을 닫았던 그때의 나처럼 스스로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나의 섣부른 말과 행동으로 또 한 번 상처를 받는다면 남자 친구 역시 영원히 숨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정말 필요한 건 자소서 작성 팁이 아닌 내가 네 편이라는 믿음이 아닐까. 그 날 나는 자소서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내려 두었다. 대신 먼저 용기를 내어 준 남자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지금까지 그가 쌓은 노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의미 있는 커리어인지,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방향은 어디인지 오래도록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로 남자 친구는 내가 묻지 않아도 자신의 계획과 진행 상황을 공유해 주었고 관심이 가는 채용 공고를 발견하거나 면접 일정이 잡힐 때 가장 먼저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해 주었다. 비로소 우리는 한 팀이 된 것이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문득 연인이 가족으로 와 닿기 시작하는 때는 언제부터일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식을 올린 다음 날부터 남자 친구가 갑자기 가족으로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서로에게 의지하는 날들이 점점 늘어가는 요즘, 이제는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서로가 가장 빛나는 순간부터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순간까지 여러 모습을 공유하며 어느 순간 우리는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보다 더 가까이에서, 가장 솔직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기쁠 때는 물론 나약해지는 때에도 이 사람만큼은 온전한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족이 된다는 건 서로에게 든든한 팀이 되어 녹록지 않은 세상을 함께 살아갈 작은 용기를 주는 과정이 아닐까. 이렇게 쑥스럽지만 마음 따뜻해지는 상상을 해본다.






 

이전 01화 그래서 나는 양보하지 않기로 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