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란 결국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
그날 이후, 어쩌면 세상과 나는 분리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기 멈춰있는 것만 같은데, 여전히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이 낯설었다.
상실, 그 기나긴 터널에서 나는 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좌절감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어느덧 아빠의 1주기가 되었다.
일상에 뚜렷한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무거운 감정을 애써 회피하거나 견뎌내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나의 주변 사람들은 위태로워 보이는 나를 잡아주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작은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스스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괜찮아졌다며 웃고 있지만, 여전히 버겁다는 사실을, 아직 많이 두렵고 힘들기에 매일 밤 잠 못 이룬다는 사실을 내 곁을 지켜주는 이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다.
사실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의 아픔을 나눠주는 것이 미안했다. 또 마음속 어떤 말을 내뱉었을 때, 아픔의 무게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건 상실이 서툰 나의 오류적인 판단에 불과했다는 것을.
혹시 지금 이 순간, 상실의 아픔으로 인해 당시 나와 닮은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서로에게 건강한 방법이라면, 지금 곁을 지키는 소중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어둠을 내보이는 용기를 가져보기를 권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인 만큼 아픔이란 공유하고 위로받는 순간, 보다 쉽게 아물 수 있다. 게다가 오히려 이로 인해 관계는 더욱 긴밀하고 돈독해질 수도 있다.
관계란 결국 서로가 서로의 빈 곳을 채워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그 바탕이 사랑이 된다면, 우리는 모든 순간에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살면서 때로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사건들과 마주한다.
이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 거센 화살을 피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첫 번째 화살'이라 부른다고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몸과 마음의 괴로움이 있다. 우린 이것을 '첫 번째 화살'이라고 부른다. -『호흡하세요 그리고 미소 지으세요』
내겐 아빠의 투병과 작별, 그리고 상실을 통과하는 모든 나날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사건이자 삶의 위기였다.
이 지점에서 내가 수많은 감정들을 경험하며, 상실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닐지라도 온전히 감당해야만 하는 내 몫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 우리가 삶에서 첫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하여 두 번째 화살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붓다가 제자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으면 고통스럽겠는가?" 제자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붓다가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두 번째 화살에 맞으면 훨씬 더 고통스럽겠는가?" 제자가 다시 답했다. "그렇습니다." 이에 붓다가 설하였다. "우리는 삶에서 첫 번째 화살을 언제나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번째 화살은 첫 번째 화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그러니 이 두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다." -『호흡하세요 그리고 미소 지으세요』
두 번째 화살은 스스로에게 겨누는 화살이다. 삶의 위기에서 마음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미 쏟아져버린 첫 번째 화살 그 자체만이 아닌, 그에 반응하는 나의 태도와 감정인 ‘두 번째 화살'인 것이다. 이는 1차적 피해에 이은 2차적 자해인 셈이다.
물론 쏟아져버린 사건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건에 의해 발생된 부정적인 감정을 지속할지, 놓아버릴지는 오롯이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감정이란 결국 삶을 바라보는 전반적인 태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내 삶에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남아있고, 이는 결국 삶이란 위기의 순간조차 온전히 '나'에게 달려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끔 혼자라는 생각에 외로워진다. 시련이 닥쳐오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야말로 진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눈을 감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한 치의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내면' 안에는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가득하다. 평소 주위를 기울이지 않기에 미처 알지 못했을 뿐, 늘 나를 돕는 노력을 하고 있다.
나에게는 '나'라는 온전한 나의 편이 있다. 언제나 내가 행복하고 잘 되기만을 소망하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무너지고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스스로를 발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내게도 내면 깊은 곳, 작지만 강한 신호를 보내고 있는 등불이 존재했다. 그리고 기나긴 상실의 터널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내게 말했다.
“이제 스스로를 향해 겨누던 화살을 내려놓고, 나와 함께 나아가 보자."
사려 깊은 시선으로 스스로의 아픔을 바라보고, 고통을 이해하며 분석하는 경험.
또 후회나 죄책감 속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고 손을 잡아주기를 반복하는 경험.
감정의 바다에 매몰될 때마다 기꺼이 몸을 내던져 스스로를 구해내는 경험.
이와 같은 경험들을 반복하며 느꼈다. 삶의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이 귀한 정성이 쌓이면, 나는 한층 성장한 사람으로 거듭나고 나아가 타인의 상처마저 공감하고 보듬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의 공간이 생기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겪은 이 상실의 시간들은 결코 내게 고통만을 주기 위하여 찾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놀랍게도 ‘상실'이란 떠난 사람이 남은 사람을 위해 남기고 간 선물, 즉 사랑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애초에 상실은 지난날, 떠난 이와 교류한 ‘사랑'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경험이다. 이 과정에서 느껴지는 모든 아픔 역시 사랑했던 사람과의 분리에서 오는 고통이므로 결국 상실의 뿌리는 사랑에 있다.
상실감이 아물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난날 서로가 교류한 관계가 그토록 아름다웠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사랑의 징표인 셈이다.
이를 진정으로 알게 되자 나는 결코 이 아픔의 시간들이 헛된 것만은 아님을 느꼈다.
상실의 터널, 그 어느 지점에서 나는 선택했다.
더는 무너지지 말자. 그럼에도 무너진다면 다시 일어서자.
뒤를 돌아봐도 까마득한 어둠에 대체 어디까지 걸어온 건지 알 수 없지만, 그조차 내게는 배움과 성장의 길이었으니까.
발걸음을 내딛자. 여전히 두렵고 서툴더라도 나를 믿고 나아가 보자.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응원하며, 상실의 여정을 조금은 즐겨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