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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 Jun 14. 2022

#15. 문장과 문장 사이



글을 쓰기 직전 워밍업에 들어간다. 운동을 하기 전 준비운동을 하는 것과도 같다. 주제를 정해 글감을 정해 쓰자고 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단어들. 이런 날은 아무리 쓰려고 해도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로 한 바닥이 가득 채워진다. 남들이 보기에는 쉽게 쓴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많은 워밍업에 시간을 소요한다. 겨우 A4 한 장을 쓰는 데 일주일이 걸릴 때도 있고 30분도 채 안 돼 다 쓸 때도 있다. 그날 그 날 기분에 따라 아니 글감에 따라 머리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건지 진짜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 매일 매일 글을 쓰자라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최상급이나 나의 게으름은 머리를 따라가지 못한다. 계획표에 “모닝글쓰기”라는 단어를 슬쩍 훔쳐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오늘은 안 쓰겠구나.’를 내 자신은 너무나 잘 안다. 그래도 계획표에는 당당히 ‘글쓰기’라고 쓰여져 있다. 글을 쓰는 일은 때로는 귀찮기도 하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보람을 갖는 일도 아니다. 그저 일상처럼 쓰지 않으면 굳어져버리는 감각들이라 매일 뭐라도 쓰지 않으면 딱딱하게 멈춰버린다.


글을 쓰려고 의자에 앉기 직전까지 머리는 알고 있다. 오늘 글을 쓰는 시간이라는 것을. 하지만 몸뚱이는 이리저리 움직인다. 볼 것 없는 텔레비전을 켜 놓고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리하고 치우고 청소하는 일을 반복한다. 작은 베란다에서 하늘 올려다보며 ‘밖에 나갈까?’라고 잠시 생각하다 꽃들에게 물을 주지 않은 일이 생각나 하나 하나 물을 주고 내친김에 베란다 청소까지 해 버린다. 어느새 해는 하늘 꼭대기까지 쨍쨍하게 내리쬔다. 아침에 글을 쓴다는 계획은 역시 오늘도 틀렸다. 겨우 의자에 자리잡고 앉아서 자판을 두드린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나는 대로 그냥 막 두드린다. 워밍업을 이제서야 시작한다.




가끔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판을 치는 일을 좋아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자판을 치는 그 소리와 리듬감이 좋아 피아노를 치는 마냥 신이 나기도 한단 말이지. 글이 그렇게 술술 써지면 좋으련만 워밍업으로 두드린 글자들은 모두 delete 버튼으로 사라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빈 공간만 덩그러니 모습을 드러낸다.


‘아, 아직 A4 한 닥은 멀고도 멀었는데.’


문장과 문장 간격이라도 늘려야 하는 게 아닌가. 빼곡하게 들어차기 시작한 글자들이 보기 싫어 애꿎은 문장을 넓혀보고 줄을 바꾸기도 한다. 그렇다고 너의 글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편집의 기술로 잠시 글이 좋아보이게 술수를 쓸 뿐.


글을 쓰는 일은 부족한 마음을 계속 채우려는 손가락의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 또 채워도 어디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계속 세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써도 나중에 책으로 내자고 하나 하나 고르다 보면 선택되어지지 못하는 나의 글들은 한 구석에서 몸은 잔뜩 찌그러뜨리고 있기도 한다. 한 장씩 한 장씩 채워나갔던 문장들이 한 순간에 날아가는 선택이다. 속기사처럼 문장을 쓰다가 버리고 다시 채우고 이곳 저곳으로 문장을 옮겨 다니면서 적당한 자리를 찾다 보면 A4를 채워진다. 고개를 들어 아니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 새 해는 뉘엿뉘엿 자러 들어간다. 얄미운 그 모습에 손가락 타자 실력을 발휘하며 마지막까지 힘을 내어 본다. 아 끝을 내야 하는데 중간중간 치고 들어오는 말들에 잠깐씩 정신을 놓기도 한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끝을 냈어야 하는데 오는 시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누구의 잘못이랴. 글을 쓰는 힘은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나의 궁둥이는 진득하게 앉아있을 틈이 없다. 일어났다가 앉았다는 수십 번을 하면서 글을 쓴다.


집중? 엄마에게는 집중의 시간은 따로 없다. 누군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에게 정말 집중할 시간이 생기기는 하는 걸까. 24시간 대기를 하며 아이들이 필요할 때, 부모님들이 필요할 때 무장해제인 채로 달려가야 하는데 집중할 시간을 따로 정성스럽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이런 일상에서 쓰고 읽고 다른 일을 하다 보니 신기한 능력이 생긴 것 같다. 아이들이 미친 듯이 옆에서 떠들어도 나를 찾지 않는 이상 초인간적인 순간 집중력을 발휘해 버린다. 그러다가 냄비도 태워먹고 빵도 태워먹고 빨래가 젖은 채로 몇 시간씩 세탁기에 늘어져있기도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이 글을 끝내야 하니까.


누구를 위해서도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냥 나를 위해서. 나의 구멍 뚫린 마음을 채워 넣기 위해서 읽고 쓸 뿐이다. 특별한 시간도 특별한 일상도 내게는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만큼 딱 그만큼의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간다.


오늘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고 그래도 하나는 하고 넘어갔다고. 나를 위한 시간, 구멍 난 내 마음 한 귀퉁이를 채웠다는 그 기쁨으로 문장과 문장 사이를 채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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