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리마에서 보내는 시간은 단 하루밖에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일어났다. 사실 남미여행에 오기 전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에 시달렸는지 지갑을 털리는 악몽을 꿀 정도였었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하지만 그렇게 무서워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리마의 거리는 아름답고 평온했다.
장거리 비행을 하는 동안 맛있는 커피가 너무나도 절실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향한 곳은 숙소에서 약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카페 <푸쿠푸쿠>였다. 이름이 왠지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이름답게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카페였다. 날씨가 좋아서 바깥 테라스에 앉아 숙소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A와 B를 기다리며 커피를 마셨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라떼가 구름처럼 온몸에 퍼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내비게이션이라도 들려보내야지, 원” 대학에 입학하고 상경했을 무렵 아버지가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항상 어리버리하고 길을 잘 찾지 못하는 내가 영 못 미더운 탓이었다. 아버지의 걱정대로 처음에 갓 상경했을 무렵에는 스마트폰이 없어서 지하철을 잘못 타는 일이 많았고, 자주 길을 잃어버렸다. 그랬던 내가 혼자 이렇게 지구 건너편 남미에 와서, 맛있는 커피가 있는 카페에 찾아와 앉아있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견했다. 따지고 보면 그때 아버지 말대로 내비게이션을 들고 다니는 셈이 된 것이다.
한시간 정도 후에 A와 B가 도착했다. A는 28살 여자애였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남미여행을 왔다고 했다. 해맑은 얼굴로 "엄마 아빠는 제가 남미에 혼자 온걸 몰라요!"하면서 A는 갑자기 우리에게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엄마 아빠에게 혼자 오지 않았다는 물증을 만들기 위해서랬다. 그래서 우린 모두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세상 친한 사람처럼 사진을 함께 찍었다. B는 23살 여자애였는데 4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책이나 TV를 통해서나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왠지 초사이언 같은 사람들일 것만 같았다. 그런데 B는 그냥 조그만 여자애였다. 그런 여자애가 고작 23살이라는 나이에 혼자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는 게 참 대단하게 느껴져서, 이십대 끝자락에 겨우 남미에 도착한 나의 20대를 새삼 돌이켜보게 했다. 그리고 또 어쩌면 그동안 내심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은 일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서로 자기 소개를 마치고 나니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우리는 리마의 유명한 샌드위치집인 <라루차>에 가기로 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지금 이 순간 남미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서 연신 꿈 같다고 이야기했다. 말 그대로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리마의 테라스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