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폿집으로 달려가다
성장소설 <낭만 10세> (8)
시장 끄트머리에 사는 느티나무가 점점 초록으로 반짝이던 어느 일요일 밤이었다. 급작스럽게 기온이 올라간 때문인지 아니면 굵은 비가 쏟아지려는 건지, 사방이 축축했다. 손님들 발길 다 떠나간 시장통엔 안개처럼 고요가 내려앉았다, 우리 집만 빼고.
월요일 등교를 준비하는 세 딸들로 부산스러웠다. 그나마 아들내미가 초저녁에 독서실로 향한 덕분에 집에는 1인분만큼의 공간이 생겨났다. 그 한 뼘의 여유는 둘째 언니 희수가 차지했다. 가난한 집에도 공주는 살 수 있다고, 희수언니는 연신 거울 앞에서 얼굴을 매만졌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거대한 벽이 가로놓인 것 같았다. 두 살이라는 나이차는 차이도 아니었다. 넘어설 수 없는, 다름의 벽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차분차분 말하고, 개구리 왕눈이의 여친 아롬이 같은 두 눈에, 엄마를 닮아 동그랗고 흰 얼굴을 가졌다. 리틀엔젤스 뺨을 여러 번 때렸을 노래 실력과 사생대회나 백일장 때면 두각을 나타내는 재능을 지녔으나, 몸은 약해빠져서 늘 어머니의 안쓰러움을 받고 사는, 타고난 공주였다. 그 밤에도 언니는 오로라 넘어 어디쯤에 두고 온 분홍빛 드레스를 그리워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장녀 희주언니 곁에 붙으면 내가 조금이라도 안심이 된다. 엄마는 우리 둘을 늘 친탁 라인으로 묶어주곤 했다. 희주언니는 나와는 외모의 판 자체가 달랐음에도. 그녀가 아기 시절엔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유, 얘는 어쩜 이렇게 얼굴이 하얗죠? 이마도 눈도, 어쩜, 서양 아이처럼 예쁘네!” 감탄하기 바빴다...고 엄마한테 전해 들었다. 흰 피부에 대한 숭배는 지금이나 그때나 여전했던 것이다. 게다가 희주언니는 성적표 받는 날마다 엄마 얼굴을 확 펴주는 실력자였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친탁 라인임에도 희주언니를 곱게 대해주었다.
“야아--, 다 죽여버릴 거야---!.”
일요일 밤의 일상이 와장창 부서졌다. 웬 젊은 남자의 발작적 외침이 밤공기를 가르고 우리 집에까지 들려왔다. 곧이어 콰당! 쨍그랑! 굉음들이 쏟아졌다.
“그래, 이놈아, 죽여라, 죽여---!”
헉! 대폿집 할머니의 목소리! 술 마시는 아저씨들이 아니라, 주인 할머니가 누군가와 싸우는 소리였다. 내 심장은 정신없이 벌렁거렸다. 우리 가족 역시 얼음이 돼버렸다.
“어느 집이지?”
희주언니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대폿집 할머니신가? 희주, 알아?”
“난 잘 몰라요, 동네 사람들. 초아야, 맞니?”
“어? 어, 할머니 맞아...”
누가 엿들으면 안 될 대화라도 하는지, 우린 목소리를 낮추고 속닥거렸다.
“이 웬수야---! 이 썩을 놈의 자식아, 돈도 안 벌어오면서 가게는 왜 때려 부수고 지랄이야, 지랄이? 하이고, 나 죽네---!”
할머니는 울부짖고 있었다. 고요한 시각이라 그런지, 그의 한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하게 들려왔다.
“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돈 좀 못 벌면 자식도 아냐? 왜 구박하고 난리냐고? 내가 확 뒈져버려야지, 에이 썅!”
아들 역시 악다구니를 써댔다. 그리고 이어지는 무서운 굉음들. '콰당콰당, 쨍그렁!'
그러다 갑자기, 소음들이 사라졌다. 정적이 흘렀다. 조용해지니 더 불안해졌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떡하나 너무 걱정이 되었다. 황급히 일어나 뒤도 안 돌아보고 튀어나갔다. 나를 부르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볼 수 없었다. 무작정 달렸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대폿집만 대낮처럼 환했다. 가게문 한 짝은 땅바닥에 누워 있고, 깨져나간 유리 조각들이 사방에서 반짝거렸다. 다리가 떨리고 무서웠지만 할머니부터 찾아야 했다.
“할머니--!”
할머니는 보이질 않았다. 대신에 헝클어진 머리의 사내가 둥그런 양철판 탁자 앞에 홀로 있고, 시멘트 바닥엔 노리끼리한 양은 주전자와 사발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사내는 꽤나 술에 취해 보였는데 찌그러진 양은 사발에 막걸리를 또 따랐다. 사발을 잡은 그의 손등은 껍질이 까져서 벌겋게 부어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꼬마, 신발 없어? ⋯ 너 뭐냐? 어디서 왔어?”
그제야 알아차렸다, 내가 맨발이었음을.
“저는요, 요...요 앞 수미의상실 옆에⋯.”
그가 의상실 이름을 알까 싶어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때였다.
“이 썩을 놈아, 그만 처먹어! 진짜 뒈질려 그래?”
할머니였다. 쇳소리가 섞인 듯한 목소리가 그때처럼 반가운 적은 없었다.
“할머니!”
“어이쿠? 이게 누구야? 안 선생님댁 막내?”
그녀는 쟁반에 받쳐 온 양은 냄비 하나를 얼른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시방 몇 신데 여기 있어? 가서 어여 자!”
분명 방금까지 대폿집에서는 살벌한 다툼이 벌어졌는데, 할머니는 평상시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인지? 나는 멍하니 눈만 껌뻑거렸다.
“뭐, 뭐야? 누가 이딴 거 달래?”
나 대신 그 남자가 할머니에게 응답했다. 그는 냄비를 밀어내며 말했다.
“젠장, 누가 이딴 걸”
“주둥이 다물어, 썩을 놈아! 쑥국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놈이. 어여 처먹어!”
할머니의 일갈에 내 심장은 다시 오그라들었다. 그 남자가 또 뭔가를 던지고 부수는 건 아닌지, 그래서 두 사람이 더 크게 싸우는 건 아닌지 애간장이 타들어갔다. 헌데 어인 일인지 남자는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숟가락을 집어 들더니 요란하게 쑥국을 떠마시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천천히 비질을 시작했다. 바닥 구석구석을 쓸었다. 이상하리만치 일상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내 눈은 그제야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들!
할머니의 나팔거리는 꽃무늬 티셔츠를 잡아당기며 내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비질을 멈추고 돌아섰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이 아가부터 집에 돌려보냈어야 하는데. 근데 시방 이 할미 괜찮냐고 물었어? 허이구, 내가 미쳐...”
할머니는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나무 의자에 앉으며 나를 사뿐히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녀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 어리둥절했지만 곧 기분이 좋아졌다. 할머니의 품에서 편안함을 느끼다니? 그럴 줄 몰랐다. 할머니의 품에 안겨 본 적이 있어야 알지...
“나무 관세음보살⋯. 내가 애기를 놀래켰구나, 미안해서 어쩌냐...”
할머니는 노래인지 무엇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내 발의 흙먼지도 털어주었다.
“진짜 진짜 괜찮으신 거예요? 쩌어기... 아저씨는요?”
“그럼, 괜찮지. 괜찮아, 가족끼리인데 뭘.”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지만 할머니는 기어이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뒤돌아 대폿집으로 걸어가는 할머니를 바라봤다. 그녀의 두 발이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작아 보였다. 그녀는 작은 발 때문인지 걸을 때 뒤뚱거리곤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녀를 ‘디뚱할머니’라고 불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