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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Jun 06. 2023

첫, 처음

막 쓰기로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시간 1

‘오늘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유일한 하루인 오늘, 내게로 온 그대를 오늘님이라 부르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오늘님?

우리들 만남의 첫날이네요, 첫날! 무엇이든 ‘첫’이나 ‘처음’ 이란 글자를 붙이면 느낌이 특별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랑과 첫사랑, 월급과 첫 월급...처럼요.


희한하지요, 글자 하나 차이일 뿐인데. 떠오르는 이미지나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문득,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요정들의 왕 오베론이 사용하는 사랑의 묘약이 떠오릅니다. 잠든 사람의 눈에 그것을 뿌리면, 잠에서 깼을 때 맨 처음 본 상대를 사랑하게 된다는 묘약이요. 그러고 보니 ‘첫’ 이란 글자도 묘약인가 봐요. 그 글자가 어디에든 붙기만 하면 떨림이랄까 아련함이랄까, 심장이 묘하게 꼼지락거리거든요.     


오늘님, 금 이 순간 떠오르는 '첫' 혹은 '처음'이 있나요? 

두 가지 이상을 적어볼까요? '첫'이나 '처음' 뒤에 단어를 붙여서요. 

궁금합니다. 오늘님이 떠올린 처음 것들이요. 혹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들어 있을까요?   

- 첫 키스, 처음 맛본 술, 첫 데이트, 처음 먹어본 짜장면, 첫 열매, 첫 생일, 처음 가 본 카페, 첫 아이, 처음 선 무대, 첫 해외여행,...

     

그 단어를 떠올린 후에 오늘님에게 남은 느낌이 미소든 찡그림이든,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든 그렇지 않든. 빈 공간에 적힌 것 모두는 오늘님의 소중한 기억들이죠.

하나하나를 소리 내 읽어보세요. 네, 작은 소리도 좋으니까 소리를 내서요. 적힌 단어가 몇 개이든 천천히 읽어본 후에, 그 단어들 중에 유난히 오늘님의 입에 착 붙는 거 하나만 골라보세요.  

선택하신 그 한 가지와 관련해서 아무거나 막 써보는 시간입니다. 

제시어는 '생각난다'

공책, 노트북 스마트폰, 백지,... 무엇이든 좋습니다. 오늘님의 언어를 기록해놓을 수 있는 약간의 여백만 있으면 무엇이든요. 그 위에 '생각난다'라고 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느낌, 생각, 사건 등을 막 써보겠습니다.

네, 아무 말이나 이어서 쓰는 거죠. 아니, 써재낍니다. 


지코라는 청년 가수의 [아무 노래]를 아시죠?

 - 아무거나 신나는 걸로 아무렇게나 춤춰,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아무개로 살래  


우리도 아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써 보아요. 오늘님의 의식이 흘러가는 그대로요. 

‘그 기억’ 자체를 설명해도 좋습니다. 파편처럼 떠오르는 단어들을 나열해도 좋고요. 혹시 짜증이나 답답함이 올라오면? 그 감정을 글자로 옮겨보는 거죠. 예를 들어 ‘뭐 이런 걸 쓰라 하지? 젠장’ 처럼요. 말 그대로, 막 써보기입니다.

맞춤법, 문장 구성, 시제 들을 따지도 마세요. '이런 걸 써도 될까?'하는 의구심도 내버리고요. 부정적 감정이 올라와도 괜찮습니다. 오늘님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에만 귀 기울여보세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고요, '참 잘했어요!' 별 다섯 개 도장을 받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니랍니다. 

그럼 일단, 출발~!

5분이 지났습니다. 네? 한 문장도 못 쓰셨다고요? 

괜찮습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한 문장이 아니라 한 글자도 못 쓸 수 있죠.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치유적 글쓰기' 강의를 하다 보면 종종 목격하는걸요. 볼펜 끝을 꾹꾹 눌러대기만 해서 종이 위에는 글자가 아닌 해독불가의 점들만 빼곡한 경우를요.

     

여섯 해 전쯤이었어요.

늦깎이 연극배우 여섯 명을 대상으로 '치유적 글쓰기'를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첫날 수업 중에 '지금 이 순간에 생각나는 것, 느껴지는 것 그대로 막 써보는' 시간을 안내했지요. 그런데 한 분이 백지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겁니다, 단 한 글자도 못 쓴 상태로요. 잠시 후에 그가 입을 뗐습니다.


"진짜로... 막 써도 되나요? 이상한 말 나오면 어떡해요? 욕... 나오면요?"


그는 평생 욕 한 번 내뱉을 줄 모르고 살아온, '착하고 참하다'는 평판의 소유자였습니다.

"쓰면 되죠. 이렇게 막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막 써보세요."

제 대답을 듣고서야 그는 볼펜을 바싹 쥐더니, 일필휘지로 써내려갔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쓴 글을 읽어줬는데, 문장들 사이사이에서 '18'이 지속적으로 튀어나오더군요. 읽어내려가는 그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붙었습니다. '18'을 입 밖으로 내질렀을 때 느낄 수 있는 쾌감 혹은 자유함을 경험하는 것 같았죠. 다 읽고 후 그의 얼굴엔 더할 나위 없이 가볍고 맑은 미소가 번졌으니까요. 

헤아려 보니 놀랍게도 딱 열여덟 번의 '18'이 적혔다고 하는 그날의 '막 쓰기'는 전설이 돼버렸답니다. 제가 안내하는 글쓰기 강의에선 반드시 소개하는 이야기로 자리잡았거든요.  

       

오늘님도 막 써보시렵니까? 하루에 한 번 혹은 일주일에 한 번!  

네, '말이 안 되게 써도 되는 막 쓰기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용해 보세요.


중요한 건 오늘님이 직접 써본다는 사실이죠.

제 지인 중 한 사람은 '독서 쫌 하는' 다독가인데요, 글쓰기는 무척 어려워 합니다. 남의 글 읽기와 내가 직접 글 쓰기는 별개의 영역 같습니다. 말로는 되는데 글로는 잘 안 되는 경우도 많고요. 

단 한 줄이라도 내 생각과 느낌을 내 뜻대로 쓸 수 있으려면? 네, 직접 써보는 것밖에는 길이 없지요. 


세간에 회자되는, 공자님의  명언 하나로 첫날 마무리할게요.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하고, 직접 해본 것은 이해한다."

    

첫만남은 살짝 가벼운 게 좋겠지요? 

오늘은 여기까지요. 오늘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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