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연적'의 위로
-너 그때 참 예뻤는데. 흔하지 않게.
내 중학교 때 친구가 새삼스레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래?
머쓱하게 웃으며 떠올린 그때는
그러나 나의 그 '흔하지 않음'이 죽도록 저주스러웠던 때이기도 했다.
나의 독특함이 상처가 되던 시절
나는 빼짝 말라 뼈마디가 울툭 불거져 나온 내 손가락이 싫었고
균형이 맞지 않아 비툴어진 얼굴이 싫었고
남들은 다 가는 미용실 한 번 가지 않아 내내 유지해야했던 긴 생머리가 싫었고
짝짝이의 작은 무쌍눈이 싫었고
어떤 바지를 입어도 안어울리는 짧은 다리가 싫었고
남들과는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는 내 삶도 별로였다.
심지어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내 손가락과 발가락의 희미한 털조차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러나 겉모습이나 환경보다도 관계적인 측면의 특이함이 내겐 더 큰 스트레스였다.
다른 애들을 보면, 늘 어떤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 같아보였는데 -가령 노는 애들은 정말 노는 애들처럼 생긴데다 그렇게 행동했고, 범생이들은 딱 봐도 모범생 같았고 실제로도 도덕적이었으며, 심지어 평범한 애들은 누가봐도 평범한 학생들 같았으며 실제로도 튀는 걸 싫어했다.-
나는 끔찍한 혼종(?)같았다. 사고방식은 꽤 자유로웠으나 겉모습은 바른생활 이미지였으며 평범하다고 하기엔 긴 생머리를 한 쪽으로 치렁치렁 내리고 다니는 스타일링(?)부터 가정환경까지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모범생일 줄 알고 다가왔던 친구들은 자유로운 나의 사고방식에 놀라 떠났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에 끌려 다가왔던 친구들은 바른 이미지 때문에 선생님들로부터 보호받는 내게 짜증을 느껴 떠났고 내가 평범한 줄 알고 다가왔던 친구들은 독특함에 질려 떠나버렸다.
그래서 나는 나의 '비정형성'이 싫었고, 평범함이 미덕이었던 학창시절에 늘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으로 나를 보호하기에 바빴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게 꼭 '안수길'작가의 단편 <제3인간형> 같았다. 그래서 내내 외로웠다.
아마 교육학 시간에 배운 '상상적 관중(모두가 나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과 '개인적 우화(나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는 비이성적 사고)'가 작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남들보다 배로 조숙하던 초등학교 때부터 쭈욱 그래왔으니까 중2병 투병을 너무 일찍부터 시작해왔던 모양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아마 내 지인들은 모두 다들 깜짝 놀랄 것이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셀프러버'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특이함을 사랑하고 심지어 나를 따돌리는 친구들의 미래를 걱정할 정도로 강한 멘탈이었던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소한 결점조차도 부끄러워 하던 나의 건강한 '자기긍정'은 고등학교를 올라가던 때 서서히 시작되어서 성인이 된 후 만났던 사람들에 의해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사람이 했던 말이 나로 하여금 나의 독특함을 증오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게 만들어 주었다.
-L은 내가 왜 좋아요?
-글쎄, '청자연적' 같다고 해야하나.
-그게 뭔데요?
-음 균형 속의 불균형으로 정리하면 될까? 뭔가 균형이 맞고 완벽한 것 처럼 보이는데 그 속에 무언가 하나 툭 다른 것이 있는거야. 모든 균형을 깨버리는. 근데 그게 싫지 않은거지.
당연히 뭔 소린지 몰랐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청자연적에 관한 수필이 있다고 했다. 훗날 찾아본 수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수필(隨筆)은 청자 연적(靑瓷硯滴)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淸楚)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女人)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平坦)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鋪道)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住宅街)에 있다.
수필은 청춘(靑春)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中年)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情熱)이나 심오한 지성(知性)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隨筆家)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餘韻)이 숨어 있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恍惚燦爛)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頹落)하여 추(醜)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 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微笑)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懶怠)하지 아니하고, 속박(束縛)을 벗어나고서도 산만(散漫)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인간성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個性)과 그 때의 심정(心情)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또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필자(筆者)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이다. 그러나 차(茶)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 문학은, 그 차가 방향(芳香)을 가지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無味)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獨白)이다. 소설이나 극작가(劇作家)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性格)을 가져 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오필리어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찰스 램은 언제나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率直)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讀者)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德壽宮)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硯滴)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整然)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均衡)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餘裕)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다가,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십분의 일까지도 숫제 초조(焦燥)와 번잡(煩雜)에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피천득, <수필>
덕수궁(德壽宮)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硯滴)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整然)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均衡)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餘裕)를 필요로 한다.
거슬리지 않는 파격. 내가 증오하던 나의 독특함이 누군가에겐 청자연적의 파격이었다니.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파격이었다니.
그것은 꽤 큰 충격이었고 지금은 그를 다시 볼 수도 만날수도 없게 되었지만 분명히 내가 나를 나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도 가끔 나의 거슬리는 조각이 보일 때면 나는 청자연적을 떠올리며 나를 나로 받아들이곤 한다. 그러면 그 거슬리는 조각이나 부분은 더 이상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녹아들어 나를 이루는 '나다움'으로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