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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월모일 Oct 23. 2021

다시 만난,선자령

초록이 가득한 세상


굴업도를 시작으로 백패킹에 빠진 지 벌써 2년이 되어간다. 백패킹 초기에는 장비가 많이 부족했지만, 그 자리를 용기와 무모함이 채워줬다. 잘 알지 못하기에 겁 없이 도전할 수 있었다. 설경을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20년 1월 나는 선자령에 올랐다. 해발고도 천 미터가 넘는 그곳을 좋지도 않은 체력으로 포기할까 말까 수십 번은 고민하면서 올라갔다. 눈으로 가득했던 그곳에서 초록의 선자령은 어떤 모습일까 어렴풋이 그려보았다. 내가 더 단단해져서, 강해져서 돌아와야겠다고 다짐하며 하산했다. 


7월 여름의 끝자락, 휴가까지 쓰고 선자령으로 향했다. 그 풍경을 다시 볼 생각에 마음이 설렜지만, 하필 내가 가는 날 날이 흐려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제발 텐트 다 피칭하고 나서 비 오게 해 주세요!”라고 선자령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몇 번이나 기도했는지 모르겠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만큼 나의 장비가 다양해졌고, 올해 초부터 시작한 운동 덕분에 체력도 좋아졌다. 선자령 입구, 정상까지는 무려 5KM를 올라가야 한다. 나는 15kg의 배낭을 메었지만 설렘이 그보다 더 컸다.

만약을 대비해 우비도 챙겼지만, 비가 오게 되면 텐트를 피칭할 때 두배로 힘들기 때문에 중간중간 날씨를 확인했다. 마음 한편엔 조급함이 들었지만, 피톤치드가 가득한 산 길을 오르다 보니 그 조급함도 금방 사라지고 만다. 산을 묵묵히 오르다 보면, 많은 것들이 비워진다.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멀어져 사사로운 일들에 지쳤던 마음도, 자꾸만 나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던 생각도 조금은 덜어내게 된다. 백패킹을 온 오늘 하루만큼은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비우고 집중하다 보면 그날의 온도, 숲 속의 냄새, 바람의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운이 좋게도 정상에 도착하기까지 비를 만나지 않았다. 서둘러 등산로 옆 쪽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텐트를 다 피칭하고 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름이 살짝 껴 흐린 날씨 덕분에 조금은 덜 덥게 산에 오를 수 있었지만, 보고 싶었던 선자령의 풍경이 구름 속에 갇혔다. 아쉬움을 텐트 안에서 듣는 빗소리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토독 토독 빗소리와,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잡다한 소음이 가득한 일상에서 멀어짐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다. 한 시간쯤 지나자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서둘러 텐트 문을 열고 나갔다. 초록의 선자령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렴풋이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던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더 짙은 초록의 풍경이었다. 그 앞에서 나도 모르게 잠시 겸손해졌다.

주말이면, 배낭을 챙기는 내게 가족들은 묻는다. 힘들게 짐 싸서 하루 만에 다시 돌아와야지, 그 짐을 다시 풀고 정리해야지, 산에서 그것도 텐트에서 자는데 불편하지도 않냐고 말이다.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땀이 나도 씻을 수 없고, 생리현상도 불편하고, 겁이 많은 나는 멧돼지를 만나면 어떻게 할지 걱정도 한가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여행이 이상하게 참 좋다. 백패킹 덕분에 저녁형 인간이었던 내가 아침형 인간이 되었고, 운동은 꿈에서도 하지 않던 내가 산을 더 잘 오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운동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올라와야지만 볼 수 있는 풍경. 언제고 그립고 보고 싶은 그 풍경 앞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다음 여행을 약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늘 깨닫게 된다. 배낭 하나면 충분한 이 여행을 끝내고 나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일상을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맞이하게 된다. 

30도가 넘는 한 여름에도 산 위에서의 아침은 제법 가을 느낌이 물씬 난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다시 돌아오는 계절을 기대해 본다. 다가오는 주말에도 나는 어김없이 배낭을 꾸릴 것이다. 비우기 위해, 다시 채우기 위해 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산에 오를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튼튼한 체력과 더 단단한 마음으로 백패킹 떠나고 싶다. 작지만 가장 큰 나의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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