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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월모일 Oct 23. 2021

가을엔 억새를 보겠어요

10월의 영남알프스

지난 선자령 백패킹에서 가을을 어렴풋이 만났다면, 이번 천황재에서는 겨울을 만나고 왔다. 갑자기 가을에서 늦가을도 아니고 초겨울로 가버린 것처럼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지난겨울 사용하고 남겨두었던 방석 핫팩까지 까먹지 않고 챙겼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셔츠 한 장 입고 외출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추워지는게 맞나요) 작년에 오빠와 함께 백패킹을 하면서 우리가 만들어둔 리스트가 있었다. 천황산, 가을에 꼭 가야 하는 곳. 원래는 10월 초에 가야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늦어지게 되었다. 혹시나 억새가 많이 떨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서둘렀다. 울산까지 가야 하는 기나긴 여정을 위해 차에서 먹을 도시락까지 싸려고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출근할 때는 참 일어나기 싫은데… 백패킹 가는 날은 알람 한 번에 일어나는 게 신기하다.

일찍 출발한 덕분에 열두 시가 되기 전에 울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울산까지 왔는데, 언양까지 왔는데, 언양불고기는 먹고 올라가야지… 원래 백패킹에 올라가서는 최대한 가볍게 먹어야 한다. 화장실도 그렇고, 음식을 많이 가지고 올라가면 그 무게를 어차피 내가 다 지고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은 가볍게 카레를 먹기로 했으니 점심을 따뜻하고 맛있는 불고기를 먹고 올라가야지. 맛있는 불고기까지 먹고 얼음골 케이블카로 향했다. 도로에 차가 별로 없었는데, 케이블카 쪽으로 갈수록 차가 많아지는 기분이었다. 사람 많으면 어떻게 하지?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향하는 도로 한쪽에 길게 주차한 차들이 가득했다. 아… 주차할 곳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던 찰나, 주차를 도와주시는 아저씨께서 반가운 소리를 들려주셨다. “저기 한자리 딱 남았어! 얼른 올라가!” 우리는 참 운도 좋다. 기뻐하는 우리 모습을 본 아저씨도 반갑게 웃어주셨다. 정말 딱 한자리 남은 그곳에 주차를 하고, 우리는 서둘러 가방을 메었다. 십 분 뒤에 출발하는 케이블카를 타야 하는데, 우리는 당일이 아니라 다음날 하산을 할 예정이라 동의서를 작성하고 올라가야 한다. 동의서를 작성하고 나니 배낭 모양의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도장을 꾹 찍어 주신다. 백패킹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다니!!! 오랜만에 타는 케이블 카보다 사실은 조금은 쉽게 올라간다는 사실에 더 신이 났다. 요즘 들어 부쩍 체력이 떨어져서 걱정했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바라보는 얼음골의 풍경이 참 훌륭했다. 능선과 협곡이 신기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만난 바람은 아래와는 세기부터가 달랐다. 가방에 있는 패딩을 바로 꺼내 입고 싶을 만큼 추웠다. 옆에 계신 아저씨는 티셔츠 한 장만 입으셨는데… 이렇게 겨울이 오는구나 싶은 마음이었다. 한 시간은 더 걸어가야 하기에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케이블카를 타고 당일 등산 혹은 전망데크까지만 올라오시는 분들도 있어서, 몇백 미터 정도는 데크계단으로 잘 정돈이 되어있었고, 본격적으로 흙길, 돌길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높이가 별로 심하지 않고 완만하게 걸어가는 코스라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지만 돌길은 발에 조금 부담이 가긴 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드디어 억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찬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완연한 가을이었다. 

부지런히 걸어가면서 오빠와 나는 과연 천황재의 몇 개의 텐트가 있을까 가벼운 내기를 했다. 나는 5동 오빠는 4동. 부디 아직 자리가 있길 바라면 걸어갔다. 중간지점이라 할 수 있는 샘물상회를 지나 천황재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길로 이루어져 있다. 요 근래 체력이 많이 떨어진 나도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중간 멈춰서 억새 사진도 찍고, 맑은 물이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고, 정말이지 진짜로 맑은 공기를 심호흡을 하며 마시고 뱉어냈다. 조금 추웠지만 힘들지 않았기에 둘이서 얘기 나누며 천황재를 향해 계속해서 걸어갔다. 천황 재가 300미터도 남지 않았을 때 하산하시는 몇 분을 마주쳤는데, 무리 중 한 아저씨께서 우리 배낭을 보고는 말씀하셨다. “얼른 들까! 좋은 자리 다 뺏기겠어!”

그 길로 빠른 걸음으로 달렸다. 아름다운 억새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때만큼은 낭만이 아니라 치열함이었다. 

‘안되는데, 구석자리 남아있어야 하는데,,,’ 성격이 급한 내가 오빠보다 먼저 천황재에 도착했다. 다행히 다행히 딱 하나! 구석자리가 남아있었다. 이미 한 7-8동은 자리를 잡은 상태였고, 가벼운 등산배낭을 멘 채 옥수수를 드시는 아주머니 두 분이 한쪽 구석에 계셨다. 우리는 아주머니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배낭을 내려놓고 아주머니들이 떠나시자마자 텐트를 피칭하기 시작했다. 주차장에도 딱 한자리 남아있었는데. 케이블카도 오래 안 기다리고 빨리 탔는데, 데크마저도 이렇게 구석자리가 하나 남아있다니 모든 게 완벽했다. 


도착하자마자 체온이 떨어지기 전에 패딩부터 꺼내 입었다. 오빠는 텐트 나는 테이블과 의자 철저한 분업 시스템 아래 비가 내리기 전 모든 정리를 끝냈다. 날씨가 조금만 덜 추웠다면 바깥에서 의자에 앉아 좀 더 억새를 감상했을 텐데 너무 추워서 일단 몸부터 녹이기 위해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텐트 안으로만 들어와도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훨씬 나은 느낌이 든다. 아직 겨울이 아닌데… 동계 백패킹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매트도 펴고, 침낭도 꺼내놓고 조금만 쉬다가 나가서 사진도 찍고 억새도 보고 좀 걷고 오기로 했다. 우리가 텐트에 누워있는 동안, 몇 팀이나 데크에 오셨는지 어렴풋이 짐작해보았다. 시끌시끌한 소리와 ‘자리 없어 저기에도 없어’ 없어가 반복되는 말소리에서 유추할 수 있었지만, 텐트 밖으로 나와 직접 본 천황재 데크는 장난이 아니었다. 역시 주말 백패킹, 그리고 가을 억새 맛집 천황재가 맞았다.

작년 가을 굴업도에서 본 갈대도 참 멋있었는데, 천황재에서 만난 억새도 참으로 예뻤다. 백패킹을 하면서 참 작은 것에 감동하고, 자연적인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계절을 이렇게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나를 우리를 더욱더 백패킹의 매력에 빠지게 한 것 같다. 초록을 좋아하는 나는, 산이 이상하게 좋았다. 누군가 바다가 좋아? 산이 좋아?라고 묻는다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산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산의 그 푸르름이 그 초록이 좋다. 하지만 천황재에서 바라보는 억새 가득한 풍경은 내가 좋아하는 초록의 풍경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가을이라는 계절을 아주 깊게 묻어있는 모습이었다. 

잠깐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금세 해가 뚝 떨어졌다. 서둘러 저녁을 준비한다. 오늘은 무인양품 카레. 산에 올라오기 전 미리 편의점에서 햇반을 데워서 준비해왔다. 각자의 바로쿡에 밥과 카레를 부어준 뒤 기다린다. 내가 산 발열제가 좀 작아서인지 밑에만 따뜻해졌다. 골고루 돌려가면 밥을 데워서 먹는다. 바로쿡 덕분에 화기를 사용하면 안 되는 산에서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안 그래도 추운데 차가운 밥을 먹는다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다. 종종 주변 사람에게 산에 가면 뭐해라는 질문을 받는다. 생각보다 대단한 걸 하지 않는다. 그저 풍경을 바라보고, 느끼고, 눈에 가득 담고 … 나에게 백패킹은 일상에서 잠시 멀어지는 하나의 행위이고, 내가 좋아하는 자연 안에서 하루를 보내다 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여행인 것 같다.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행복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만족한다. 그날 천황재에서 우리는 억새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고, 내년 가을의 억새도 함께 보자며 약속하였고, 오빠가 좋아하는 리버풀의 축구경기도 저녁을 먹으며 함께 보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텐트에서 나가기 싫어진다면, 침낭에서 나가기 무서워진다면 동계가 시작된 게 맞는 것 같다. 오늘은 다양한 텐트들이 많아서 텐 풍이 훨씬 더 예쁘게 찍힐 텐데 텐트 밖으로 나가기가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나가야 하니까 꼭 그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후드를 한 번 더 여미고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막상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천황재 데크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으로 올라가 아름다운 천황재의 모습을 담았다. 


모든 게 완벽했던 하루였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두 개의 방석 핫팩 중 하나의 핫팩이 터지고 말았다. 우리는 여분의 핫팩이 없었고, 오빠는 이 추위에 솜 침낭을 가지고 올라왔다. 심지어 나는 배낭 공간이 부족해 에어매트가 아닌 발포매트를 가져와 밑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견뎌야 하는데… 핫팩을 더 챙기지 않은걸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오빠는 내게 에어매트를 양보해주었다. 오빠 덕분에 밑에서 올라오는 한기는 좀 피했지만 너무 추워서 새벽에 몇 번이나 깼는지 모르겠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땐 오빠에게 잠시 핫팩을 빌렸다. (중간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한 시간을 넘게 핫팩을 뺐어서 오빠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다음날 아침, 엄마는 내게 “살았있니?”라고 반가운 아침인사를 해주셨다. 분명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밤새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여분의 핫팩을 항상 챙길 거니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야겠다.

지난 선자령 백패킹 때에는 한 여름에 가을의 냄새를 맡았다. 선자령은 천 고지 이상이다 보니까 아침에 기온이 많이 낮은 편인데, 생각보다 얇게 입었던 우리는 한여름에 침낭을 감 싸매고 텐트 밖으로 나와 아침해를 바라보았다. 이번 천황재에서는 겨울이었다. 10월, 완연한 가을에 우리는 겨울을 느꼈다. 백패킹을 하면서 이렇게 계절을 몸으로, 온도의 냄새로 체감하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매력적이다. 바로쿡으로 물을 데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하산을 준비하려고 한다. 산 위에서 특히나 추울 때 마시는 커피 한 잔의 매력은 아마 마시지 않아 본 사람을 절대 모를 것이다. 특히 달달한 믹스커피의 그 맛이 환상이다. 

어제보다 더 맑은 날씨 덕분에, 하산길에 바라보는 억새는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내년 가을에 다시 볼 억새를 기대하면, 2021년의 억새를 눈으로 마음으로 가득 담았다. 배낭이 무거워도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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