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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Apr 24. 2024

인생과 역사를 이끄는 흥과 에너지

K컬처와 세계의 문화현상 3 <스페인>

한국과 비슷한 유럽의 변방, 스페인     


의외로 스페인과 한국은 인연이 깊고 비슷한 점이 많다. 한반도에 발을 디딘 최초의 유럽인은 스페인의 가톨릭 사제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1593년 한국에 온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예수회 신부의 활동 기록엔 한국인들이 평화를 사랑하며 지적인 민족이라고 묘사되었다고 한다.  

    

한국과 스페인은 비슷한 현대사를 경험했다. 비극적인 내전을 겪은 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뒤, 오늘날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민주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하며 양국 간 협력 관계를 계속 강화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건 두 나라 사람들의 기질이 비슷하다는 점, 흥이 많고 유쾌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한다. 스페인은 ‘한 집 건너 바(Bar)’라고 할 정도로, 함께 수다를 떨며 즐기는 게 일상이다. 한국은 때로 ‘아시아의 라틴’이라고 불린다. 사는 모습이 비슷한 데가 많은 것이다.     



세계사의 주역에서 문화의 강국으로     


스페인은 유럽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변방이다. 여행하기 쉽지 않다. 지리적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럽의 중심 무대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척박한 조건은 오히려 도전과 변화를 자극했다. 1492년 콜럼버스에서 시작한 대항해시대의 선도국가로 부상하며, 일약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퇴한 1588년 즈음까지 100여 년은 역사상 가장 찬란한 스페인 시대를 열었다.    

  

스페인은 문화적으로도 세계사의 한 장을 차지하며 그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문학, 미술, 건축, 음악, 영화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작가와 예술가를 배출하고, 인류의 보석처럼 빛나는 수많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대항해시대는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까지 스페인어권 인구를 확대하면서 그들의 문화적 지평을 넓혔다. 독특하고 매력 넘치는 역사 자원과 문화유산은 현대까지 전 세계에 걸쳐 공유 확산하고 있다.        


 

축제의 나라 스페인을 대표하는 '소몰이 축제'의 모습. 스릴과 흥분이 넘친다.



흥과 에너지가 넘치는 나라     


스페인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흥과 에너지다. 유럽의 많은 나라 중에서도 뭔가 다르고 강렬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축구와 투우, 플라멩코 같은 정열적인 춤, 술과 수다문화, 다혈질적인 그들의 삶이 만들어내는 왁자지껄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스페인은 흔히 태양의 나라, 축제의 나라라고 불린다. 유럽의 최남단이라 기후 조건이 좋고 기질도 낙천적이라 일 년 내내 축제가 끊이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축제는 이른바 ‘소몰이 축제’라고 불리는 산 페르민 축제. 13세기에 북부 바스크지역의 팜플로나에서 시작한 유서 깊은 종교축제다. 하지만 갈수록 흥겨운 놀이와 화합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유명한 이벤트가 좁은 골목길에서 박진감 있게 진행되는 소몰이 장면. 부상 위험이 있어도 사람들이 쫓기며 달리는 스릴과 흥분이 축제의 매력을 최고조로 이끈다.  


이 축제에 푹 빠진 사람이 헤밍웨이다. 축제 자체가 그의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1926)를 통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사냥과 낚시가 취미로 모험과 격동의 삶을 살았던 헤밍웨이는 이 축제에 9차례나 직접 참가할 정도로 열광적인 팬이었다고 한다. 스페인의 축제가 가진 마성과 중독성을 확인할 수 있다.     



강렬한 여성서사     


스페인은 또 하나의 강렬한 장면을 소환한다. 바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자유분방한 집시 여인인 카르멘의 격정적인 사랑과 인생행로를 보여주는 <카르멘>은 1875년 초연 당시 커다란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의 여주인공인 카르멘은 밀수, 치정살인 등을 일삼으며 삶 자체가 치열한 생존과 다름없었던 최하층 집시 여인. 작품은 지배층의 부패상 묘사나 사회 비판적인 요소도 다분했다.      


유명한 아리아인 ‘하바네라’에서 카르멘은 자기에게 무관심한 돈 호세를 유혹하면서 노래한다.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새, 누가 불러도 싫다면 소용없어.... 날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사랑할거야.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그땐 날 조심하세요...” 카르멘은 순진하고 찌질한(?) 남자 돈 호세를 파멸로 이끄는 ‘팜므파탈’의 화신,  한편으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여전사였다. 불꽃같은 인생의 대명사가 아닐까.


이 작품은 원작자인 메리메와 작곡가 비제 모두 프랑스인이다. 작품의 무대는 1820년경 스페인의 세비야. 투우장, 떠들썩한 술집 등을 비롯해 스페인 남부의 정서와 분위기가 이국적이다. 질풍노도의 드라마가 펼져지는 오페라는 유럽의 여느 나라나 지역보다 스페인이 썩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나 <세비야의 이발사> 등 스페인을 무대로 한 작품이 인기를 끈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전통 춤 플라멩코. 16세기경 집시, 무어인, 토착민 등의 문화가 융합돼 발전했다고 한다.



K컬처와 여성 파워     


카르멘을 떠올린 건 K팝의 여성전사(?), K컬처의 여성서사가 생각나서다. K팝 걸그룹들은 대부분 강렬한 여성의 이미지를 발산한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2022년 ‘누드(NXDE)’라는 곡에서 카르멘의 ‘하바네라’를 샘플링한 곡을 선보였다(*샘플링은 어떤 곡의 일부를 자신의 음악에 편집 재배치하는 것). 여성을 상품화하고 물신화하는 세태를 풍자한 도발적인 곡이다. '(여자)아이들'이란 그룹명 자체가 ‘아이(I)’에 복수(-들)를 붙인 것이라고 한다. 자신들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싶은 의지를 담았다. 2022년 SBS 가요대전 무대에서 르세라핌도 '하바네라'에 맞춰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춤과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K컬처의 세계적인 성공요인으로 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여성서사다. K컬처의 역사에서 강인한 여성이 서사를 주도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사회 경제적으로 독립적 주체적인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그들의 활약상이나 성공담이 주를 이룬다. K컬처 팬덤의 다수를 차지하는 세계 여성들의 열렬한 호응과 지지도 따랐다. <대장금, 2003> <내 이름은 김삼순, 2005>부터 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2022> <더글로리, 2022>까지 그 리스트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국성과 다양성, 혼종의 문화     


문화 관광 측면에서 스페인의 가장 큰 강점과 매력은 문화적 종교적 이질성과 다양성이 아닐까 싶다. 유럽의 여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이슬람 문명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780여 년에 걸친 이슬람 세력의 통치는 특히 스페인 남부 지역을 신비롭고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피카소의 고향은 알람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에서 멀지 않은 항구도시 말라가다. 피카소 작품세계의 강렬함과 다양성은 스페인의 민족적 기질과 이슬람 문화의 이질성, 남부의 독특한 지역 정서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스페인의 문화에는 역사적 요인, 민족적인 기질, 종교적 이질성과 독특함이 반영돼 있다. 흥과 에너지가 넘치는 스페인 문화는 한국인이나 K컬처와도 일맥상통하다는 생각이 든다. K컬처가 지속가능하고 세계인의 사랑과 주목을 받기 위해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K컬처 또한 한국의 압축적인 성장의 역사,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민족성, 서구 주류문화와는 다른 독특하고 강렬한 매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다채로운 문화 현상은 문화의 힘과 다양성을 일깨워준다. 문화가 행복을 주는 이유다.            



핫플 여행지인 론다의 누에보 다리.  말라가주의 도시 론다는 투우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표지 사진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이슬람 문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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