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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Sep 18. 2019

나의 여행 레시피, '시간 반', '공간 반'의 추억

다시 채워져 갈 마음의 공간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다행히 아내와 딸도 여행을 좋아한다. 부부가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 사소한 것이 큰 다툼으로 번지는 것을 자주 봤다. 물론 자녀와의 공유(共有)도 중요하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와의 공유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에게 여행은 공유의 좋은 수단이다. 하루 24시간, 함께 먹고, 자고, 놀면서 다양한 경험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것은 뇌 속에서 장기기억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고 부른다. 집에서도 얼마든지 먹고, 자고, 놀 수 있다. 하지만 집에서 이루어진 행위가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추억'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공간의 공유'가 함께 이루어져야 더욱 선명(鮮明)한 추억이 될 수 있다. 


나의 기억 속에 첫 여행은 양수리 계곡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방학 때면 저렴한(?) 교회학교 수련회가 늘 가족 여행을 대신했다. 이런, 죄다 수련회 기억뿐이다. 그래서 가족 여행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다. 하나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리 가족은 부모님의 교회 친구분 가정(이하 '이 집사님 가족' 이라 하겠음)과 함께 양수리 계곡으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계곡 옆 자갈밭에 텐트를 치고, 가스버너와 코펠을 이용해서 찌개도 끓여 먹고, 고기도 구워 먹었다. 물가에 앉아 조약돌이나 만지작거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이 집사님은 수영을 가르쳐 주겠다며 계곡물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셨다. 어린 나는 그게 그렇게 공포스러웠다. 7월 장마철이라 유속도 빨랐고, 수심도 깊었을 텐데, 옆을 보니 이 집사님 아들, 후니 형은 혼자서 유유히 수영하면서 놀고 있었다.


당연하다. 형은 당시 동네에서 가장 좋은 로얄 수영장의 정기 회원이었다. 얼마나 좋았으면 이름도 '로얄'이었겠는가. 형네는 부자였다. 나는 비릿한 소독약 냄새가 싫었다. 그래서 웬만해선 '로얄 수영장' 옆도 안 지나갔다. 그게 수영을 못 배운 공식적인 이유였다. 그래야 우리 집 형편을 원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나보다 한 살 많은 후니 형을 따랐다. 형이 진짜 우리 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형이 너무나 야속했다. 마침내, 물속에서 발이 닿지 않는 것을 직감하고 소리쳐 울었다. "사람 살려!!!" 나의 완강한 몸부림에 이 집사님은 나를 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 텐트 옆 돗자리에 나를 내려놓으면서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씀하셨다. "마! 사내자식이 뭐 이리 겁이 많노?" 경상도 사내답게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나를 참 예뻐해 주셨다. 덕분에 난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했다. 모든 게 다 처음이었다. 낚시도 해봤고, 바다 배도 타봤다. 고급 호텔 뷔페에서 밥도 먹었고, 놀이 공원에서는 자유이용권으로 놀았다. 특히, 집사님의 최신형 고급 승용차를 타는 것이 좋았다. 고급 승용차는 가죽시트 냄새도 좋았다. 집사님은 볼 때마다 새로운 차를 타시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사람이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다니셨다. 차는 항상 검은색이었다. 이 집사님이 국내 모 대기업의 임원으로 승승장구하시는 사이, 우리집 형편은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고, 후니 형이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나면서 이 집사님 가족과의 교류는 점차 줄어들었다. 여행은 양수리 계곡이 마지막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여행에 대한 '추억'도 여기까지다.


몇 해 전, 나는 이탈리아 출장 중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국내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에 이 집사님의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었다. 검색창을 따라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다. 이 집사님은 검찰 소환을 하루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회사의 모든 잘못을 자신이 안고 가겠다는 유서를 남기신 체...

 마음이 많이 아팠다. "마! 사내자식이 뭐 이리 겁이 많노?" 이 집사님의 목소리가 양수리 계곡의 모든 공간과 더불어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대한민국을 뒤덮은 여행열풍

 나 어린 시절에 여행을 즐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때는 사는 게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소셜미디어는 온통 친구들의 여행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텔레비전을 켜면 죄다 여행 컨셉의 프로그램 천지다. 십여 년 전, '1박 2일'을 통해 국내 여행의 붐(Boom)이 일어나더니, '꽃보다 할배'를 통해 해외여행의 붐이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연출자가 같은 사람이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없던 한식당도 생겨났다. 프로그램에 노출된 공간은 어김없이 한국인들의 인기 여행지가 되었다. 사실, 나도 한몫했다. 최근엔 여행을 주제로 한 책도 인기다. 심지어 TV 시사프로그램에서 독설에 가까운(?) 날 선 모습으로 익숙한 유시민 씨도 '유럽도시기행'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직업이 작가인 그가 무슨 주제든 책을 통해 이야기한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경제학을 전공한 그가 처음으로 쓴 책도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다. 다만, 어색하게 느끼는 이들도 소수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아무튼 대한민국 사회를 뒤덮은 '여행 열풍'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꾸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여행하는 것을 즐긴다.

나는 '시간'과 '공간'의 공유가 적절하게 배합되지 않은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현대인들은 바쁘다. OECD 국가 중, 한국인들의 연간 휴가 일수는 꼴찌 수준이다. 독일인의 연간 평균 휴가 일수는 28-30일이고, 휴가 사용률도 93%에 이른다. 반면, 한국인들의 연간 평균 휴가 일수는 7-10일이고, 휴가 사용률도 70% 정도이다. 그러니까 자꾸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여행하는 것을 즐긴다. 그래놓고선 "어제는 파리를 다녀왔고, 내일은 뉴욕에 갈 거야"라며 허세를 떤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돈이 되니까 방송국도 계속해서 여행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그로인해 예전보다 여행 인구도 늘었고, 여행산업 시장도 커졌지만,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 비할 바는 아니다. 여전히 창의적인 여행을 하는 이들은 드물다. 여행을 '추억'으로 만들려면 앞서 말한 대로 '시간'과 '공간'의 적절한 공유가 필요하다. 텔레비전 화면 혹은 소셜미디어 속 사진이 보여주는 '이미지 공간'은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하게 소모되는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추억을 만들 수 없다.


 또 누군가는 그런다. "여행도 좋고, 추억 쌓는 것도 좋은 데 시간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가요." 일리 있는 말이긴 하다. 우리는 그동안 '시간(time)'에 밀려 '공간(space)'을 시답잖게 여겼다. 이제 '공간'에 주목하자. "공간은 매 순간 인간의 상호작용에 개입하고, 의식을 변화시킨다." 내 말이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vre)의 말이다. 그는 공간적인 것이 시간적인 것보다 우세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나의 생각은 이렇다. 여행은 '시간'을 소모(消耗)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간'을 사유(私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시간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간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여행을 갈까, 말까 고민된다면 가는 게 맞는 거다.

이제 나의 여행 추억은 '양수리 계곡'을 넘어선 지 오래다.


이글은 코로나19 이전에 쓴 글이다. 여행을 갈까 말까 고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작은 기적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모든 게 지나가고 마음껏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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