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양양으로
2019년 봄, 우리는 결혼을 했다. 갯마을은 친구들과 서핑을 하며 살고자 만든 곳이었고 그곳을 우리 둘이 온전히 쓰기엔 집이 너무 컸고 오래된 주택이라 일주일에 한드럼씩 들어가는 기름값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시끄러운 주말도 한몫했고, 너무 가까운 옆집과의 거리도 그랬다.
당시만해도 양양에 와서 산다는건 여유있는 삶의 집합체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시간과 공간이 여유롭지 않다면 궂이 여기서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갯마을이라는 동네가 주는 무드와 풍경이 너무너무 아쉬웠지만 더이상 내가 살 수 있는곳은 아니었다.
해외로 나갈 계획도 잠시 세웠지만 코로나가 터졌다. 이런 저런 이유가 겹치고 겹쳐 갯마을에 있던 게스트하우스를 팔고 동산에서 카페 2층으로 이사를 했다. 12평의 작은 집에서 나는 행복했다.
갯마을에 살 때 처럼 옆집과 붙어있었지만 각자 다른 출입문의 위치로 마주할 일이 크게 없었고 옆집에 사시는 펜션 사장님도 참 좋으신 분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적당한 거리, 느슨한 관계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서핑을 하며 붙어지내던 친구들도 조금씩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서핑을 시작하고 2~4년 차에는 서핑에 미친사람처럼 굴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누적되고 각자의 업이 기다리고 있는 삶이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제자리로 돌려놓는것 같았다.
나도 제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자리가 아닌 새로운 자리를 찾고 싶었다. 둥지를 찾아야 했다. 12평의 집이 나의 둥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방에서의 삶을 버티기엔 카페도 집도 너무 작었다.
1층 20평중 3평은 그의 커피 로스팅실이었다. 1.8kg짜리 작은 로스팅기로 20분에 1키로 정도를 볶을 수 있
는 투입시간 대비 생산률이 극악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공간은 너무 작았고 그 공간에서 할수 있는 최선이었다.
우리는 소박하게 살자고 했다. 봄부터 초겨울까지 일하고 겨울이 오면 손님도 없으니 여행을 가는 삶을 살자고 했다.
겨울이 오면 손님이 없으니 여행을 가는 삶은 가능했다. 하지만 여름을 제외하고 봄가을에도 손님이 없는 상황이 몇해째 연출되었다. 그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었던것 같다.
그가 납품을 하던 카페의 원두 사용량을 보면 극명하게 나타난다. 한달에 쓰는 원두 양이 대부분 30%안밖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여름은 극도로 바빳다. 카페도 바빳지만 원두도 불티나게 주문이 들어왔다. 매일밤을 새다싶이 하면서 두달 가까운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것이다. 여전히 주말에만 양양에 와서 쉬는 나에게 그는 나의 노동력을 바라지 않았다. 온전히 꿋꿋하게 홀로 밤을 새서 원두를 볶고 머리만 잠시 붙이고 일어나 다시 원두를 포장했다.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내수시장이 없는 지방의 지방, 지방이라 해도 읍내라던지, 관광지 같은곳에 자리 했다면 조금 다른 결론이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말 그대로 지방에서도 지방인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12평의 2층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가 터지고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마지막으로 나는 양양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도 활성화 되고 비대면으로 일하는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시기였으므로 양양에서도 내가 하던일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일단 짐을 옮겼다.
성인 2명의 짐이 처음으로 합쳐지던날 이사짐을 보며 한탄을 했다. 우리는 그리 짐이 많은 편도 아닌데 짐을 풀곳이 없었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는 빽빽한 집이되어버렸다. 정말 작아도 너무 작은 집이었다.
5도 2촌하며 살았던 집은 귀촌을 선택하니 살수 없는 집이 되었다. 그래서 이사를 생각했다.
카페는 여기에서 하고 사는 곳은 이사를 가자고 생각했다.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를 괜히 팔았다고 잠시 후회도 했었다. 내가 귀촌을 이렇게 빨리 선택할지 몰랐다.
귀촌하면 생각나는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지은 다음에나 귀촌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정말 내 마음같지 않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합가도 이사도 내 계획대로 되는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