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스윔 Oct 01. 2023

04. 두 번째 집

서울에서 양양으로

제대로 놀고먹지도 못한 주제에 돈을 어디다 썼는지 15년쯤 일해서 내 손에 남겨진 돈이라곤 5천만 원도 안되는데 빚을 잔뜩 내서 집을 샀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바닷가 앞에 더 작은 집이 탐이 났다.

언니에게 반반씩 사자고 했다. 말이 반반이지 언니가 돈을 내고 대출은 내가 받아  내가 갚는 거였다.

갯마을에 산 집보다 더 작은 땅과 집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2층집이었고, 2층에서 바다가 보였다. 바닷가 모래사장까지 걸어서 30초면 닿는... 아주 작고 귀여운 집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2층에서 바다가 보이니까 사자고 했다. 그렇게 그 집도 샀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바닷가마을의 모든 게 담겨있는 것 같았다. 바다가 보이는 것도 좋았다.


아주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정작 내가 가진 두 채의 집을 다 합쳐도 서울은 언감생심 경기도권의 아파트 전세가도 겨우 나올까 말까 한 돈이었다.

그때까지의 양양은 그랬다.

길에서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특별함이라곤 1도 없던 외관


그렇게 일단 집은 샀는데 여전히 나는 5도 2촌이었다. 그럼 이 집은 어떡하지?

언니랑 나는 세를 주자고 했다. 바닷가 앞이니 한 달 살기 같은 걸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결정을 할 무렵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서울에 있는 카페에서 오래 일했다. 사람이 많은 매장에서만 일을 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커피를 내어주던 사람이었다.

그 역시 나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양양에 내려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를 만나게 해 준 부부인 J와 L도 양양에 내려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J와 L은  인구해변 앞에 카페와 펜션을 짓고 있었고 그곳에 그가  일을 하며 머무는것을 서로의 계획으로 가지고 있었다.

카페와 펜션이 지어지고 그는 거기서 일을 하며 한 해를 보냈고 나와 미래를 이야기했다.


당시 남자친구이던 신분이었지만 나는 과감히 그를 동산리 2층집에 카페를 차리게 회유했다. 썩 내켜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강경했다.

해! 무조건 하는 거야!


양양에도 핫플레이스가 있다. 우리는 핫플레이스와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굶어 죽겠나 싶었다. 로스팅을 해서 원두를 납품하고, 카페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모했다. 여름을 제외하고는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 동네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한적함, 내가 좋아하는 그 무드와 분위기를 섣불리 믿었다.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해지는 동산해변의 풍경을 좋아했다.


우리 가족에게  집이라는 것이 생긴 이후로 쭈욱 우리 엄마, 언니, 오빠의 집을 손봐주시던 어르신 두 분이 내려오셔서 겨울 내내 공사를 했다. 공사기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2주 정도 계획했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때는 수리하는 것에 대한 금액이 어떻게 책정되는지도 정확히 몰랐다. 그냥 100만원 하면 100만원에 천년만년 완성해 주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그냥 언젠가 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르신 두 분도 나와 같은 지점에 도달해 있었던 것 같다. 일도 하지만 서울에서 잠시 벗어나 별이 선명히 보이는 밤을 맞이하고 달빛을 덮고 잠들고 파도소리에 아침을 맞이하는 생활, 공사하다 날이 좋으면 낚싯대를 들고 해변에 앉아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시며 하염없이 앉아있는 시간...


나와 즐기는 방식만 다를 뿐 그곳의 무드, 그 시간, 그 분위기를 포함한 모든 것을  느끼고 계셨던 건 아닐까 싶다. 다음에 또 집 사면  불러달라며 겨울이면 좋겠다며,  잘 곳만 마련해 달라던 인사가 왜 그렇게 아릿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래도 꽤나 긴 시간 우리 가족들이 집을 수리해 주시며 나누었던 몇 마디의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본 삶의 고단함을 내가 아주 조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봄이 되고 동산해변 언저리에 오래된 겉모습의 소박하고 작은  "동산에서"라는 작은 스페셜티 카페가 탄생했다.

어쩜 이리도 무모했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는 그렇게 양양 사는 사람도 서울 사는 사람도 아니게 조용히 묻어져 살아가는 듯했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워낙 많아 우리는 누군지 잘 티나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20평남짓 한 곳에 손님도 잘 드나들지 않는 카페...


그쯔음 타지에서 온 서퍼들로 온 동네가 들썩들썩하였으니 우리는 더욱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동산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인사를 안 해도 나는 일주일에 2일만 양양에 머물렀고 얼굴을 볼 일도 잘 없는 상황이었다.


동네 어른들이 뭘 부탁해도 거절하고,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도 싫었다. 배추를 한 포기 주시면 고춧가루 한 봉지를 거침없이 달라고 하는 것도 싫었고 나는 안 받고 안 주고 싶었다. 서울에서는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래서 동산리 바닷가 앞 "동산에서"라는 카페를 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과 일절 교류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동산에서를 하는 동안은 적어도 나는 서울에 대한 미련 아닌 미련이 있었고 양양에서 자리잡지 못하면 서울로 돌아가면 되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 언저리에 있었던 것 같다.


도시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중에 지방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고 한다. 아마 내가 사는 양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디서 시작을 했고 어디에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조금씩 차이만 있을 뿐 나 역시 돌아갈 곳은 서울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서울에 한 발은 남겨두는 심정이 있었다.

지방에서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깊은 간섭과 관찰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동네 사시는 아저씨들의 훈수가 참으로 많았다. 간판을 세워라, 반짝거리는 걸 붙여라, 저기 옆동네에 가봐라 사람들이 줄을 섰더라 같은 영업과 홍보에 대한 훈수부터 페인트 칠을 하는데 오셔서 페인트는 그렇게 칠하면 안 된다 왜 수성을 바르냐 유성을 발라야지 이 집을 내가 지었다 같은 훈수까지 종류도 다양하고 훈수도 다양했다.

할 수 있는 건 직접 했다. 디자인도 간판도 시트작업도 페인트도...


막상 카페는 오픈했는데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는 전혀 광고를 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커뮤니티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냥 오는 손님을 받고 알음알음 소개로 원두를 납품했다.


우리만의 우려는 아니었는지 동네 어르신들이 누가 커피숍 없냐 물어보면 동산에서 카페를 가리키며 저어~기 커피집이 있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렇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주 5일을 도시에 있던 나는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했다. 사이버 알바라는 케릭터로 매일 인스타그램을 올렸다. 사람들은 인스타그램 속 알바가 누군지 참 궁금해했다. 그러니까 결국 동산에서는 우리의 인스타를 재미있게 보신 분들이 우리의 캐릭터와 무드 분위기를 궁금해하며 찾아오신 건데 당시 우리의 인스타그램 팔로워수는 겨우 500명 남짓 할 때였다.


햇살이 있는 따듯한 주말이면 그래도 꽤나 손님이 찾아왔다. 처음엔 어떻게 오셨는지를 많이 물어보았던 것 같다. 대부분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왔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카페를 오픈하고 카페를 찾아오는 손님은 정말 손에 꼽힐 정도였고 그는 목을 길게 빼고 창문을 내다보곤 했다.

해가갈 수록 우리만의 분위기가 생겨났다.


사실 동산에서라는 카페의 위치는 네비게이션을 찍고 찾아와도 찾기 어려운 곳에 있다. 너무 구석에 있어서 라던지 차로 갈 수 없는 곳이라던지 하는 이유가 아니라 바다가 코앞에 있는데 바닷가 앞이 아니라는 사실에 사람들의 기대는 응당 바닷가로 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손님이 없었다 한들 축구공을 이리저리 차는 아이와 이를 제지하긴커녕 같이 축구공을 받아주던 아빠라던지...

샤워기도 없는 하나뿐인 화장실 카페에 들어와서 모래로 엉망이 된 아이를 양해도 없이 종이컵에 물을 담아 뿌려가며 씻기는 일이라던지...


아메리카노 한잔에 5명이 화장실을 가는 건 그냥 귀여운 수준이고, 카페는 디테일이 생명이니까 라며 유럽과 일본을 갈 때마다 사온 소품들은 모두 없어졌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쓰라고 하면 별책부록으로 한 권은 쓸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풀고 일단 묻어두기로 한다.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한 나는 무례한 사람이 세상이 이렇게도 많은가 싶을 정도로 놀랄 일이 많았다.

무례한 손님이 오면 이러이러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러면 안 오셔도 된다는 식의 인스타를 올리기도 했다.


캐릭터라는 말이 좀 웃긴 것 같지만 그냥 그게 현실이었다. 나는 여전히 5도 2촌을 하고 있었고 일을 하면서 인스타그램을 관리했다. 사실 관리라기보다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동산 해변에 있지만 해변 앞이 아닌 이유로 지나가다 들어오는 워크인 고객의 수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대부분 인스타그램을 통해 혹은 주변의 추천을 통해 카페를 방문했다. 그래서 단골고객도 꽤 있었다. 인스타그램 속 나는 "사이버알바"라는 캐릭터로 시작했고 그는 "바리스타리, 로스타리, 사장"세 가지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

카페이자 우리의 레스토랑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혼자 운영할 수 있는 크기라고 위안 삼으며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전 03화 03.여행의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