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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 욕과 인정 욕의 사이

by LBR

누군가 가장 원하는 가치가 무엇이냐 물어올 때마다 나는 안정감이라 대답하곤 했다. 어디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이 주는 안정감. 워낙 널뛰는 감정 세포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사람인지라 일이든 사랑이든 모든 분야에 있어 안정감을 부르짖었다. 얼마 전 나의 안정감에 대한 고민을 덤덤히 들으며 한라 토닉을 말아주던 선배가 말했다.


" 너는 사실 인정 욕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야. 크고 안정적인 곳에 속해 있다고 해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네 스스로가 어떤 일을 잘 해내고 인정받고 있다고 느낄 때 거기서 안정을 느끼는 사람이야. "


선배는 타인은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성형해주며 미래 커리어를 컨설팅해주는 일로 꽤 많은 돈을 벌던 사람이었다. 그래 그 사람들이 괜히 선배에게 지갑을 열며 찾아왔던 건 아니었군. 그는 처음으로 나에게 선배 노릇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계속 나의 커리어적 멘털 상태를 진단해 주었고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네가 일에서 얻고자 하는 안정감을 사랑이 주는 안정감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면 안 돼. 그 안정감은 사랑이나 어떤 관계에 있어 얻을 수 있는 한 부분인데 그걸 차원이 다른 종류의 일에서 찾으려고 하니까 괴리가 생기는 거야. 다시 말하지만 너는 인정 욕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네가 그토록 부르짖는 크고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서 루틴 한 일을 반복한다고 한들 절대 네가 원하는 안정감을 느낄 수는 없을 거야. “


마음을 울리는 진단이었다. 나라는 사회적 자아가 가진 이 죽일 놈의 인정 욕. 얼마 전 회사의 회식 자리에서 잔뜩 술에 취한 상사가 내뱉은 한마디가 이 모든 고민의 시작이었다.


" 그 일 너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누굴 불러다 놔도 다 할 수 있는 일이야. 그 일? 나 혼자서도 다 할 수 있어. 너 더 존버 해야 돼 인마. 지금 네 가치를 한 번 어필해봐. "


생각 없이 걸어가다가 물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부족할지언정 열과 성을 다해 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저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 세포 마을에 세워져 있던 단단한 박이 팡하고 터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유명 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에 나오는 주인공 유미의 머릿속에는 주인님인 유미가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거대한 박이 하나 설치된다. 남자 친구가 서운한 말과 행동을 해서 속상할 때마다 세포들은 단단한 박을 향해 콩주머니를 던진다. 아무리 커다란 바윗돌을 던져대도 금만 살짝 가고 말뿐 좀처럼 터지지 않던 박이 사소하기 그지없는 말에 기분 상한 세포 하나가 툭 하고 던진 돌멩이 하나에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지고야 만다. “헤 어 져”라는 현수막을 뱉어내며.


내 머릿속에도 좌뇌엔 '러브'박, 우뇌엔 '워크'박이라는 것이 있었다. 너무도 무식하게 견고해서 멘털이 와장창 깨질 정도로 무시당하고 자존감이 짓밟혀도 굵직한 금만 생길 뿐 결코 터질 생각을 안 하던 그 '워크'박이 무심코 던진 그의 사소한 콩주머니 같은 멘트에 쩍 하는 소리를 내며 터져버린 것이다. “그 만 둬”라는 현수막을 내뱉으며. 차라리 너 더 열심히 해야 돼 인마! 까지만 했어도... 그냥 기분 무지 나쁘네 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쏟던 애정과 노력이 그렇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폄하되어버린 순간, 온몸에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무리 회사의 인정을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스무 살 무렵 꿈꾸던 십 년 뒤 ‘보람’의 삶은 일과 사랑, 그중 하나에서는 안정감을 이루고 살고 있을 줄 알았다. 막연히 꿈꾸던 워너비적인 삶과 현재의 괴리감 때문에 그 시절의 나에게 자주 사과하곤 한다. 아직까지 이런 고민 따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선배의 말처럼 일과 사랑에 있어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은 종류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에 있어서는 한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4대 보험의 혜택을 누리며 매 월 같은 날 정직한 숫자의 월급을 받는 안정된 톱니바퀴 같은 소속감을 느끼는 것만이 내가 바라는 삶이라 생각해 왔는데. 사실 나는 내 노력을 폄하해버리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그간 더 한 모욕과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성장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왔던 회사를 떠나야겠다 결심을 할 만큼 인정 욕이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다. 차라리 무언가 구체적인 잘못을 짚어서 이것이 너의 고쳐야 할 점이라고 했으면 받아들였을 텐데.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굉장히 이례적인 쉼표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육아 휴직의 명목도 아닌 미혼 직장인의 한 달간 휴직 기간. 모두들 이 휴직 사유를 궁금해했다. 나를 상담해 주던 선배도 궁금해했다. 그 당시 휴직을 했던 진짜 이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쉼표의 시간을 찍고 다시 돌아왔는지에 대해. 내가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고 누군가에게 털어내고 이렇게 글로 남기게 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돌아보고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계속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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