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대 기획 프로그램 '2020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를 시청하게 된 건 순전히 아빠 때문이었다. 나훈아는 물론이고 요즘 안 본 사람은 사회적 대화도 못 낀다는 트로트 프로그램을 시청은커녕 클립 영상으로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요즘 우리 아빠 삼진 씨의 제안은 무조건 따르고만 싶다. 그는 좀처럼 뭘 먼저 하자고 제안하지 않는 아빠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오늘 저녁은 귀가 후 가족들에게 우리 와인 한잔할까, 경춘선 숲길을 산책할까 하며 나를 놀라게 하더니 급기야 아니다 저녁 8시 30분에 나훈아 콘서트가 한다고 했어, 그걸 보면서 다 같이 와인을 마시자며 구체적인 가족 디너 프로그램을 제안한 것이다. 평소 트로트의 티읕자도 싫어하던 나였지만 아빠의 신난 표정을 보니 거부할 수 없었다. 거실로 티 테이블을 옮기는 해맑은 우리 집 가장의 미소를 보며 이런 게 사랑인가 보군 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부엌에서 와인잔을 챙겼고 엄마는 돼지 껍데기를 구워 오셨다.
생각보다 나훈아 콘서트는 고퀄이었다. 직접 만들었다는 수많은 히트곡을 부르는 그의 무대 매너와 간드러진 기교의 가창력에 이래서 나훈아 나훈아 하는구나를 인정하게 됐음은 물론이고 솔직하고 순수한 노래 가사들이 내 마음에 사뿐히 와 닿아 내려앉을 때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런 내 반응에 아빠는 뿌듯해했고 나 역시 와인은 떫다고 마시지도 않던 우리 아빠가 어느덧 딸의 취향에 물들어 와인을 한두 잔씩 즐기게 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애당초 계획은 한 30분만 보다가 조용히 일어날 생각이었으나 결국 콘서트의 막바지까지 눌러앉게 되었고 나훈아의 신곡 '테스 형'을 마주하게 되었다. 테스 형...? 대체 그게 뭐지. 검색하면 나오려나. 나훈아는 문장마다 테스 형을 소환하며 세상이 왜 이리도 힘든 건지. 사랑은 또 왜 이런 건지.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냐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아... '너 자신을 알라'에서 살짝 감을 잡아 버렸다. 그의 테스 형은 소크라테스였던 것이다.
어쩌면 테스 형은 오랜 시간 그의 뮤즈였을지도 모른다. 홀로 한 잔의 술을 걸치며 그의 철학에 태클도 걸어보고 떼도 써보며 그를 애정 해왔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다. 나훈아에게 테스 형이 있다면 나에게는 에쿠니 언니가 있었다. 대학생 시절, 작가 에쿠니 가오리와 번역가 김난주 선생의 조합이 만들어낸 소설 작품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나는 오랜 시간 에쿠니 언니와 혼자 친해져 버렸다. 그녀가 오랜 시간 사랑했을 거라 짐작되는 남자의 모습, 수영을 좋아한다는 것, 늘 홍차를 내려 마신다는 것, 따뜻한 목욕물을 받아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길 즐긴다는 것 등. 나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갔다. 그리곤 혼자 생떼를 써왔다. 나도 언니처럼 여분의 시간에 대해 잘 표현해보고 싶어. 펄펄 끓는 뜨거운 사랑도 그렇게 덤덤하게 얘기해보고 싶어. 소소한 일상을 써도 마치 금가루 뿌려 놓은 것 마냥 빛나게 써보고 싶어. 가끔 참 철도 없지 싶은 나를 돌아보며 진짜 '어른'이란 뭘까에 대한 생각이 들 때면 떠오르는 책이 있다. 나의 그녀,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 '울지 않는 아이'.
어른스럽다는 것은 등뼈를 반듯하게 세우고 있는 것, 어리광을 피우거나 아부하지 않는 것.
에쿠니 가오리 <울지 않는 아이> 中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등뼈는 굽어있고 한결같이 인생에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 어른은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사회에 나온 지도 벌써 10년 차다 보니 20대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처음 저들보다 나이가 많은 만큼 뭔가 더 아는 것도 많고 여유롭겠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알려줄 것이 많은 성숙한 어른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저 친구들보다 나이가 많아도 나는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다. 직장 생활 중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으면 열도 받고 욕도 하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사랑이 시작되면 산고의 고통을 잊고 둘째를 임신하는 산모처럼 이별의 고통을 깡그리 잊은 채, 온갖 설렘에 들떠 얼굴이 상기되고 그 인연이 끝에 다다르면 누가 볼까 당황스러울 정도로 눈물이 주룩주룩 흐른다. 아주 조금 더 유연해진 것이 있다면 그저 이 하루도 지나갈 것임을 머리로는 아는 것. 이 정도다.
그 해 겨울은 유독 몸과 마음이 시렸다. 일 년간 적립금처럼 꾸준히 쌓여왔던 충격적인 사건들이 마음에 주었던 상처는 미처 아물지 못한 채로 덧나고 있었고 회사에선 첫 기자 간담회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개인 업무 평가 발표를 준비를 병행하며 안팎으로 시달렸다. 강하게 키워진다는 명목 하에 온갖 디테일한 부분을 마이크로 매니징 형태로 지적 받으며 자신감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갔다. 결전이 날의 다가왔고 나와 같이 입사한 나의 동기는 너무도 훌륭하게 발표를 마쳤다. 이젠 내 차례였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모니터 앞에 서서 회의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마주한 순간 갑자기 눈앞의 시야가 물리적으로 흐릿해져 왔다. 준비한 스크립트도, 화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면접 때도 떨어본 적 없던 내가 난생처음 겪어보는 공황상태였다. 혀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 준비된 말들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내 손에 들고 있는 종이조차. 눈앞의 사람들이 무서웠다. 모두 나를 손가락질할 것 같았다. 미친 듯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상사는 이 발표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나를 평가하게 했다. 너무너무 추운 겨울, 아무것도 입지 않고 눈 밭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 어렵게 마음을 열어 시작했던 짧은 연애도 끝을 맺었다. 너무너무 지겨웠다. 회사 일이 힘들었던 것도, 연애가 끝난 것도 처음이 아닌데. 힘들다는 느낌을 넘어 아득했다. 언제까지 이 지겨운 과정을 반복하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집에서 인정하던 '쥐뿔 없어도 자신감 하나는 세계 최고'였던 딸은 거기에 없었다. 그 자리엔 충분히 자신감 있게 '어른'의 삶을 살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나 대신에 일과 사랑 모두 어찌해야 할 바 모르며 쩔쩔매고 있는 공황상태의 어린아이만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힘들다는 마음보다 더 위험한 마음은 '지겨운' 마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다음 날 처음으로 계획 없는 연차를 내고 하루 종일 앓아누웠다. 그리고 그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임원실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말했다.
" 퇴직하겠습니다 "
의외로 사표는 한 번에 수리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나의 무너진 상태를 인지하고 있던 상태였다. '시간이 필요해?'라는 제안에도 당장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잘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안되어 보였던 탓이었다. 그날 저녁, 부 대표님께서 나를 따로 불러 조용히 물어오셨다.
" 회사에서의 일들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어차피 시간은 흘러가. 이 일 싫어하지 않잖아. 이대로 상처만 안고 나가는 건 원하지 않아. 한 달만 시간을 가져보면 어때? "
그때야 얼어붙은 것만 같았던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나는 여전히 우는 어른이었다. 잘 우는 아이였다가 도중에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가 결국 우는 어른이 되었다는 에쿠니 언니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