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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도 아빠처럼 할 수 있을까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by LBR


새벽 5시 12분,
시설물 낙하로 인해
광운대~청량리역 간
1호선 전동열차 운행 일시 중지.
12시 복구 예정.
시민들께서는 타 교통수단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 It's 재난문자 드림




직장인들의 아침 출근길은 늘 예민하다. 마스크 사이로도 느껴지는 잔뜩 굳은 표정,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 있는 어깨 근육과 누군가 살짝 스치기만 해도 휙 하고 돌아보는 피곤한 눈초리까지. 모두 바짝 곤두서 있음이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난감한 순간은 바로 출근길 지하철에서 전동차 사고 소식을 맞이했을 때다. 물론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고 사람이 다치지 않은 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지만 정말이지... 참 난감하다.


이럴 땐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다음 차를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지금 당장 역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아야 하나. 아니지, 카카오톡 택시를 호출해야 하나. 지금 나 같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텐데 잡히긴 잡힐까? 퇴근길은 일부러 돌아서라도 간다지만 출근길은 다르다. 거의 모든 직장인들이 거처와 직장 사이의 거리를 고려한 각자만의 플랜 A로 출근길에 오르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큰 사고였는지 재난문자가 들어왔다. 당당히 늦을 수 있는 증빙을 확보하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휴대폰으로 도착한 해당 증빙을 재빠르게 캡처해 회사에 즉시 이 상황을 보고했다. 비가 워터파크 인공 파도처럼 정신없이 쏟아지던 한 여름이었다. 이 날도 어김없이 대찬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정말 운 좋게도 아빠가 집에 있는 몇 안 되는 날이기도 했다. 역을 뛰쳐나가 재빠르게 아빠를 호출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빠는 연중무휴로 일하고, 일이 없어도 현장에 나가다가 비가 오는 날에만 겨우 쉬는 사람이었다.


지하철 시설물이 떨어져 공교롭게도 딱 우리 집 앞에 있는 역의 다음 역부터 끊겼다는 노선. 이런, 쉬어야 하는 건가? 갑자기 쉴 수 있나? 머릿속에 마무리해야 하는 월간 보고서와 주간 보고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글의 목록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냥 포기하고 한 숨과 함께 아빠의 차에 올랐다. 문득 비가 와야만 겨우 쉬는 우리 아빠에게 아주 흔한 질문을 하고 싶어 졌다.



“ 아빠, 아빠는 지금 하는 일 말고 다른 일 하고 싶었던 적 없었어? 뭐 해보고 싶었던 사업이라던가... “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빠의 대답이 이어진다.



“ 읎어~! “


“ 아니, 아빠... 1초는 좀 생각을 해보고 대답.... "

“ 읎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왜 다른 일을 생각해. "



글을 쓰기 시작 한 뒤로 가장 좋은 점은 이런 아빠의 성의 없는 대답에도 작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를 보면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도 참 문제였다. 아빠는 40년이 넘게 한 업을 묵묵히 이어가는 나름 본인 업(業)의 장인이었다. 그런 그는 이직을 서슴지 않는 딸을 지켜보며 정녕 이 유전자가 내 유전자가 맞나 고민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마인드는 늘 사업주 마인드였다. 남의 돈 버는 게 어디 쉽나, 사장들은 다 그래. 회사에서 너한테 십만 원을 주면 너는 그 다섯 배는 벌어다 줘야 하는 거야. 그렇게 본인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성장해 갈 수 있는 거야. 지금 들어보면 구구절절 맞는 말씀입니다만 몸에 좋은 쓴소리란 본래 혀 끝에선 그저 쓰게 느껴지는 법이다. 조금 더 어릴 땐 내가 아빠만큼의 인내심이 없는 걸까 하는 마음에 자책도 많이 했었다. 내 생각에 아빠는 일터에서 본인의 존재감을 느낌으로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빠의 옆모습을 보며 아 오늘 연차 쓴다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곱게 접어 머릿속 한구석에 처박았다. 죄 없는 가방 끈을 불끈 쥐고 청량리역에서 내렸다. 늦지 않게 출근하려면 얼른 내리라는 아빠의 짧은 잔소리와 함께.


그 날 저녁,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 이란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매일 뭔가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맛이 획기적으로 나아지거나 갑자기 나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 (중략)

스무 살의 내가 역전 근방에서 매일 몇 편씩, 때로는 몇십 편씩의 시를 노트에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가게 주인들의 세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김연수 작가 <소설가의 일> 中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매일 새벽 반복적으로 가게 문의 셔터를 올렸다던 김연수 작가의 동네 상인들처럼, 우리 아빠 삼진 씨도 매일 새벽 반복적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마치 가게 셔터를 올리듯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현관문을 나섰고 매일매일 성실하게 그만의 셔터를 열었다. 일이 있는 날이든 혹은 일이 없는 날이든 별 상관이 없었다. 꼭두새벽 출근은 늘 그의 삶을 차지해버린 유일한 루틴이었으니까.


포항 출신 삼진 씨는 졸업식 다음 날, 기술을 배워 먹고살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혈혈단신 맨 몸으로 상경했다. 서울의 유일한 연고는 시집간 누나 집이었다. 그렇게 포클레인 기술을 배우고 그 업계에서 같은 사무실의 사람들과 일한 지 어느덧 4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그렇게 하루키를 능가하는 성실함으로 그의 아내와 하나뿐인 딸을 먹여 살렸다.


한 가지 신기했던 사실은 아빠가 평생 지금 하는 일 이외에 단 한번도 다른 일로 눈을 돌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랬을 것이고, 내가 태어나 자라며 봐왔던 모든 시간들 속에서도 그랬다. 아빠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어 보였던 순간은 언젠가 정부의 정책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일감이 반으로 줄어들며 집에서 쉬는 날이 많아졌을 때였다.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장인 정신으로 평생을 버텨오던 그는 갑작스레 생겨버린 휴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무얼 하며 쉬어야 할지 몰라 늘 불안해했다. 그리곤 다시 현장으로 나갔다. 그에게 스스로가 가장 가치 있게 느껴지는 장소였던 그 일터로. 마치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엄청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요즘 내가 왜 이렇게 업(業)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달고 사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몸도 마음도 너무 아팠던 그때, 나의 자존감이 언제 건드려지는지 깊게 들여다보기 위해 매일 새벽마다 떠오르는 감정들을 종이 위에 쏟아냈다. 영화 <인턴>에 첫 등장한 프로이트의 문장처럼, 사실 사람의 삶이란 사랑하고 일하고 일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전부 인 건지도 모르겠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같지 않을까. 내가 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무렵 찾아왔던 극도의 스트레스나 이별 후 상실감에 마음이 무너질 때, 깊은 수중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숨도 쉬기 힘들고 몸도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던 시간들. 그걸 딛고 물 밖으로 올라와야만 했을 때 배운 것이 있다. 나의 가치는 나만이 정하고 나의 내면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모순이고 자만이다. 내가 일로서 찾는 자존감에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공을 들였다는 자기만족과 더불어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피드백과 타인의 반응도 포함된다. 이 두 가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자존감은 충족된다. 타인의 인정과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낮은 자존감 때문이 아닌 정상 반응이라는 걸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오히려 나의 자존감 치유는 시작됐다.


그 뒤로는 나의 문제점을 하나씩 공들여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만져지지도 않는 글의 문장들을 다듬고 고치고를 반복하며 내 앞의 일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허세 잔뜩 들어간 의미 부여는 접어 두고 그냥 머슴처럼 돌을 굴려 올렸고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 아빠를 생각하면서. 우리 아빠처럼 되고 싶어서. 마치 이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김연수 작가 <소설가의 일> 中


김연수 작가가 '매일 글을 쓴다'라는 행위와 '한순간 작가가 된다'사이에 남 모르게 쌓아왔을 수많은 반복의 시간들을 존경한다. 그저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작가님 동네 상인들의 가게 셔터, 작가님네 어머니의 팥빙수, 우리 가족을 풍족하게 먹여 살렸던 성실한 아빠의 포클레인. 내가 너무도 애틋한 마음으로 애정 하는 가치들이다. 이 책의 문장들이 가르쳐준 것처럼 뭐든 내 손에 닿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쌓아가 보련다. 그 시간들이 쌓여가는 과정을 풍경처럼 즐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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